750. 감히 신부님한테 건방지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나는 성령 운동을 하며 항상 오지를 다니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때만 해도 교통이나 정보통신이 잘 발달되지 않았기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싶어도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나는 도움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오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열망이 매우 컸었다. 그래서 나는 3박 4일 일정으로 해남군의 시골 마을 신자들을 위해 성령쇄신 세미나를 하게 되었다.
나는 피정이나 성령 세미나 등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는 신자들을 찾아가서 세미나를 해드리는 것이 무척이나 기뻤다. 그래서 나도 당시 지도신부님이신 남 신부님과 이 바오로 회장님을 포함한 7명의 봉사자 중 한 명으로 참석했다. 첫 강의를 남 신부님이 하시게 되었다. 성령 봉사자들은 뒤쪽에서 강론을 듣는데 신부님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신부님은 평소에도 강론을 무척 잘하시는 분이셨다. 나는 주님을 향한 갈망으로 힘들게 시간을 낸 시골 마을 신자들이 좋은 강론을 잘 듣지 못할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런데 강의가 끝나고, 다른 봉사자들이 뒤에서 수군거렸다. “아우, 신부님 강론은 참 좋은데 소리가 너무 작아서 뒤에서는 들을 수가 없어!”
그러자 한 자매가 “맞아, 정말 왜 그럴까? 좀 크게 했으면 좋은데.”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뒤에서 말하는 것은 판단이고 험담이라고 생각했기에 “신부님께 말씀드립시다.” 했더니 모두 정색을 하며 “율리아! 뭔 소리 하고 있냐! 어디 평신도가 교만하게 신부님께 그런 말씀을 드려.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야.
“절대로 안 돼. 감히 신부님한테 건방지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해!”하며 서로 야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좋은 강론 말씀을 신자들이 다 들어야 하잖아요.” 하니, “떽! 꿈도 꾸지 마.” 하는 것이었다. 험담은 하면서도 정작 신부님께 조언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평상시 이웃의 실수나 잘못을 보고도 가만히 있으면 그것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못된 점은 고칠 수 있도록 사랑으로 알려주는 것이 바로 주님 안에 한 형제요, 참사랑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뒤에서는 불평하면서도 정작 신부님 앞에서는 강론이 너무 좋았노라고 칭찬만 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래서 나는 그들이 내 말을 잘 받아들여 준 셈쳤다.
그리고 그들이 봉사자가 가져야 할 진정한 사랑으로 거듭나기를 지향하며 생활의 기도를 바쳤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주님께 여쭈었다. “주님!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신부님의 좋은 강론을 신자들이 다 들어야 하지 않나요? 성령 세미나에 어렵게 참석한 사람들인데 알아듣지 못하면 너무 아깝잖아요. 그죠?”
바로 그때 예수님의 인자하신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하는 내 작은 아기야! 지금 너의 그 생각이 바로 내 생각이기도 하단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사랑으로 말해주렴.”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나는 안심하고 신부님께 기회를 봐서 말씀드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750. 감히 신부님한테 건방지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나는 성령 운동을 하며 항상 오지를 다니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때만 해도 교통이나 정보통신이 잘 발달되지 않았기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싶어도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나는 도움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오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열망이 매우 컸었다. 그래서 나는 3박 4일 일정으로 해남군의 시골 마을 신자들을 위해 성령쇄신 세미나를 하게 되었다.
나는 피정이나 성령 세미나 등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는 신자들을 찾아가서 세미나를 해드리는 것이 무척이나 기뻤다. 그래서 나도 당시 지도신부님이신 남 신부님과 이 바오로 회장님을 포함한 7명의 봉사자 중 한 명으로 참석했다. 첫 강의를 남 신부님이 하시게 되었다. 성령 봉사자들은 뒤쪽에서 강론을 듣는데 신부님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신부님은 평소에도 강론을 무척 잘하시는 분이셨다. 나는 주님을 향한 갈망으로 힘들게 시간을 낸 시골 마을 신자들이 좋은 강론을 잘 듣지 못할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런데 강의가 끝나고, 다른 봉사자들이 뒤에서 수군거렸다. “아우, 신부님 강론은 참 좋은데 소리가 너무 작아서 뒤에서는 들을 수가 없어!”
그러자 한 자매가 “맞아, 정말 왜 그럴까? 좀 크게 했으면 좋은데.”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뒤에서 말하는 것은 판단이고 험담이라고 생각했기에 “신부님께 말씀드립시다.” 했더니 모두 정색을 하며 “율리아! 뭔 소리 하고 있냐! 어디 평신도가 교만하게 신부님께 그런 말씀을 드려.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야.
“절대로 안 돼. 감히 신부님한테 건방지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해!”하며 서로 야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좋은 강론 말씀을 신자들이 다 들어야 하잖아요.” 하니, “떽! 꿈도 꾸지 마.” 하는 것이었다. 험담은 하면서도 정작 신부님께 조언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평상시 이웃의 실수나 잘못을 보고도 가만히 있으면 그것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못된 점은 고칠 수 있도록 사랑으로 알려주는 것이 바로 주님 안에 한 형제요, 참사랑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뒤에서는 불평하면서도 정작 신부님 앞에서는 강론이 너무 좋았노라고 칭찬만 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래서 나는 그들이 내 말을 잘 받아들여 준 셈쳤다.
그리고 그들이 봉사자가 가져야 할 진정한 사랑으로 거듭나기를 지향하며 생활의 기도를 바쳤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주님께 여쭈었다. “주님!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신부님의 좋은 강론을 신자들이 다 들어야 하지 않나요? 성령 세미나에 어렵게 참석한 사람들인데 알아듣지 못하면 너무 아깝잖아요. 그죠?”
바로 그때 예수님의 인자하신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하는 내 작은 아기야! 지금 너의 그 생각이 바로 내 생각이기도 하단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사랑으로 말해주렴.”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나는 안심하고 신부님께 기회를 봐서 말씀드리기로 마음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