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삶을 포기하는 저에게 아내는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런 아내를 보는 저의 가슴은 또 저며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아이들을 두고 가야 하다니 하느님께선 저와는 아주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포기하고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아빠의 모습과 육성을 남겨주자.’ 무비 카메라를 장만하여 저의 모습과 육성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자매님이 나주 성모님의 근황을 설명하며 찾아뵙기를 저에게 권했습니다. 현대 의학으로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불치병인 임파암(림프암).
이런 저에게 나주 성모님께서 치유의 은총이나 자비를 베풀어 주시리라고는 사실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살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저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언젠가 지나쳐 버린 성모님의 피눈물을 다시금 생각하며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 매달렸습니다. 죽음의 벼랑에 선 저로서는 매달릴 수밖에….
“어머니! 방탕한 생활과 쾌락 속에서 어머니를 슬프게 한 이 망나니가 왔습니다. 용서하여 주소서.” 하며 눈물로 잘못을 빌면서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면 이제 남은 시간 어머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받아 주십시오.” 봉헌하고 돌아가는 저의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매달 올 때마다 고향의 어머니 집 가는 것처럼 저의 가슴은 환희에 벅차고 설레었습니다. 나주에 오면 올수록 저의 몸은 생기가 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항암제를 맞으면 구토와 고통이 일주일 이상 간다던데 저는 며칠 만에 회복이 되고 이틀 전에 맞고도 전주에서 나주까지 운전을 하고 와 철야 기도를 하고 돌아가도 몸의 상태는 아주 건강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 힘이었겠습니까? 저는 그때 가장 강한 항암제를 맞고 있었습니다. 몸의 이상은 느끼지 못했어도 콧속의 암 덩이는 저를 성가시게 했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 부작용 또한 엄청났습니다. 평생 침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말에 또 한 번 절망했습니다.
매달 올 때마다 고향의 어머니 집 가는 것처럼 저의 가슴은
환희에 벅차고 설레었습니다. 나주에 오면 올수록 저의 몸은
생기가 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항암제를 맞으면 구토와
고통이 일주일 이상 간다던데 저는 며칠 만에 회복이 되고 이틀
전에 맞고도 전주에서 나주까지 운전을 하고 와 철야 기도를 하고
돌아가도 몸의 상태는 아주 건강했습니다 아멘!!!아멘!!!아멘!!!.
서서히 삶을 포기하는 저에게 아내는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런 아내를 보는 저의 가슴은 또 저며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아이들을 두고 가야 하다니 하느님께선 저와는 아주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포기하고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아빠의 모습과 육성을 남겨주자.’ 무비 카메라를 장만하여 저의 모습과 육성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자매님이 나주 성모님의 근황을 설명하며 찾아뵙기를 저에게 권했습니다. 현대 의학으로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불치병인 임파암(림프암).
이런 저에게 나주 성모님께서 치유의 은총이나 자비를 베풀어 주시리라고는 사실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살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저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언젠가 지나쳐 버린 성모님의 피눈물을 다시금 생각하며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 매달렸습니다. 죽음의 벼랑에 선 저로서는 매달릴 수밖에….
“어머니! 방탕한 생활과 쾌락 속에서 어머니를 슬프게 한 이 망나니가 왔습니다. 용서하여 주소서.” 하며 눈물로 잘못을 빌면서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면 이제 남은 시간 어머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받아 주십시오.” 봉헌하고 돌아가는 저의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매달 올 때마다 고향의 어머니 집 가는 것처럼 저의 가슴은 환희에 벅차고 설레었습니다. 나주에 오면 올수록 저의 몸은 생기가 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항암제를 맞으면 구토와 고통이 일주일 이상 간다던데 저는 며칠 만에 회복이 되고 이틀 전에 맞고도 전주에서 나주까지 운전을 하고 와 철야 기도를 하고 돌아가도 몸의 상태는 아주 건강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 힘이었겠습니까? 저는 그때 가장 강한 항암제를 맞고 있었습니다. 몸의 이상은 느끼지 못했어도 콧속의 암 덩이는 저를 성가시게 했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 부작용 또한 엄청났습니다. 평생 침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말에 또 한 번 절망했습니다.
1992년
김 니꼴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