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7. 예수님을 전할 수만 있다면 기쁘게 지갑을 열리라
광주 대교구 성령 세미나나 피정이 있을 때에도 루비노 회장은 도초에서 올라와 참여했다. 봉사자들이 “율리아는 예수성심에 미쳤어.” 하자 루비노 회장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율리아는 예수 성심에 미쳤어. 예수성심에 미친 여자야.”라고 했다.
나는 항상 예수성심에 대한 사랑에 푹 빠져있었기에 입만 열면 예수성심을 찬미 찬양하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옆에서들 “루비노 회장은 같은 말이라도 왜 저렇게 하지?” 했으나 나는 그 소리가 너무 좋았다. ‘예수성심에 푹 빠져 미친다면 골백번 미쳐도 좋다. 미친 여자라 해도 좋다. 그래, 예수성심에 더욱더 미치자.’ 생각하며 주님께 찬미 찬양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루비노 회장은 자신이 공소 회장으로 있는 도초 공소로 우리 성령봉사회를 초청했다.
“율리아, 김대건 신부님 축일에 율리아가 우리 공소에 이문식 바오로 회장님을 모시고 같이 와서 피정을 좀 해주면 좋겠어.” 하는 그의 말에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오지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하는 것은 나의 간절한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락한 뒤 이내 깜짝 놀라게 되었다.
왜냐하면 루비노 회장이 초청한 사람이 광주대교구의 성령봉사 회장님과 나 단둘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여자 두 명과 회장님도 아니고, 남녀 단 두 명을 함께 초청한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예비자 때부터 알아 온 성령 봉사회장님이기에 신뢰하는 마음으로 함께 갔다.
예수님 사랑을 받은 셈치고 봉헌하며 피정이 잘 되도록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나를 초청하며 루비노 회장이 말했다. “율리아, 도초가 작은 섬이라 피정을 하려면 꽃도 좀 있고 해야 할 텐데 필요한 것들을 좀 사다 줘.” 하며 꽃을 비롯하여 몇 가지 물품들을 사 오라고 했다.
나는 아주 단순하게 ‘그곳이 작은 섬이라 구할 수 없나 보다.’ 생각하고 전부 사서 짐을 싸 1984년 7월 4일, 광주교구의 훌륭하신 성령봉사 회장님과 함께 도초로 가게 되었다. 나는 우선 나주에서 버스를 타고 광주로 올라가, 회장님을 모시고 또다시 버스로 목포로 가야 했다.
그래서 시간이 배로 걸리게 되었다. 나 혼자라면 힘들어도 사랑받은 셈치고 봉헌했겠지만, 함께 가는 분이 광주대교구의 회장님이시기에 불편 없이 모시고자 신경이 많이 쓰였다. 광주에서 다시 목포로 간 뒤, 목포에서 배를 타야 했기에 교통비도 많이 들고 중간에 회장님을 모시고 식사도 해야 했다.
다행히 나는 어딘가를 갈 때 돈을 넉넉히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 불쌍한 사람이나 거지들이 있을지 몰라서였다. 돈이 없어 어려운 사람을 만나도 도와주지 못했던 가슴 아픈 과거의 기억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렇게 섬으로 들어가는 뱃삯 및 기타 교통비, 가는 길에 회장님과 나의 식대까지 다 내가 내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전하는 데 쓰이는 돈이니 계산하지 않고 모든 비용을 기쁘게 내가 다 냈다. 나는 ‘공소 신자들이 어떻게 하면 은총을 많이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목포항에서 도초까지 배를 타고 가면 그때는 3시간 정도 걸렸는데, 가는 내내 피정자들을 위해 묵주기도를 봉헌했다. 기나긴 여정 끝에 드디어 도초에 도착하자, 나와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던 루비노 회장이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787. 예수님을 전할 수만 있다면 기쁘게 지갑을 열리라
광주 대교구 성령 세미나나 피정이 있을 때에도 루비노 회장은 도초에서 올라와 참여했다. 봉사자들이 “율리아는 예수성심에 미쳤어.” 하자 루비노 회장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율리아는 예수 성심에 미쳤어. 예수성심에 미친 여자야.”라고 했다.
나는 항상 예수성심에 대한 사랑에 푹 빠져있었기에 입만 열면 예수성심을 찬미 찬양하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옆에서들 “루비노 회장은 같은 말이라도 왜 저렇게 하지?” 했으나 나는 그 소리가 너무 좋았다. ‘예수성심에 푹 빠져 미친다면 골백번 미쳐도 좋다. 미친 여자라 해도 좋다. 그래, 예수성심에 더욱더 미치자.’ 생각하며 주님께 찬미 찬양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루비노 회장은 자신이 공소 회장으로 있는 도초 공소로 우리 성령봉사회를 초청했다.
“율리아, 김대건 신부님 축일에 율리아가 우리 공소에 이문식 바오로 회장님을 모시고 같이 와서 피정을 좀 해주면 좋겠어.” 하는 그의 말에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오지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하는 것은 나의 간절한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락한 뒤 이내 깜짝 놀라게 되었다.
왜냐하면 루비노 회장이 초청한 사람이 광주대교구의 성령봉사 회장님과 나 단둘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여자 두 명과 회장님도 아니고, 남녀 단 두 명을 함께 초청한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예비자 때부터 알아 온 성령 봉사회장님이기에 신뢰하는 마음으로 함께 갔다.
예수님 사랑을 받은 셈치고 봉헌하며 피정이 잘 되도록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나를 초청하며 루비노 회장이 말했다. “율리아, 도초가 작은 섬이라 피정을 하려면 꽃도 좀 있고 해야 할 텐데 필요한 것들을 좀 사다 줘.” 하며 꽃을 비롯하여 몇 가지 물품들을 사 오라고 했다.
나는 아주 단순하게 ‘그곳이 작은 섬이라 구할 수 없나 보다.’ 생각하고 전부 사서 짐을 싸 1984년 7월 4일, 광주교구의 훌륭하신 성령봉사 회장님과 함께 도초로 가게 되었다. 나는 우선 나주에서 버스를 타고 광주로 올라가, 회장님을 모시고 또다시 버스로 목포로 가야 했다.
그래서 시간이 배로 걸리게 되었다. 나 혼자라면 힘들어도 사랑받은 셈치고 봉헌했겠지만, 함께 가는 분이 광주대교구의 회장님이시기에 불편 없이 모시고자 신경이 많이 쓰였다. 광주에서 다시 목포로 간 뒤, 목포에서 배를 타야 했기에 교통비도 많이 들고 중간에 회장님을 모시고 식사도 해야 했다.
다행히 나는 어딘가를 갈 때 돈을 넉넉히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 불쌍한 사람이나 거지들이 있을지 몰라서였다. 돈이 없어 어려운 사람을 만나도 도와주지 못했던 가슴 아픈 과거의 기억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렇게 섬으로 들어가는 뱃삯 및 기타 교통비, 가는 길에 회장님과 나의 식대까지 다 내가 내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전하는 데 쓰이는 돈이니 계산하지 않고 모든 비용을 기쁘게 내가 다 냈다. 나는 ‘공소 신자들이 어떻게 하면 은총을 많이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목포항에서 도초까지 배를 타고 가면 그때는 3시간 정도 걸렸는데, 가는 내내 피정자들을 위해 묵주기도를 봉헌했다. 기나긴 여정 끝에 드디어 도초에 도착하자, 나와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던 루비노 회장이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