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찬미성모님
광주지부 한옥 마을의 이은주 마르타입니다.
나주성모님을 마음에 모시면서 많은 이웃들의 도움을 받고 영적으로 풍요로움을 느꼈었는데
나태해진 나 자신을 반성하면서 나는 과연 40주년이 되도록 어떤 이웃이었는지
나도 누군가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천사의 역할을 해 왔는지 되돌아 보며
이 글을 읽는 모든이에게 은총으로 흘러들어가 주님 영광드러나기를 기도하며 글을 써 봅니다.

저는2004년 뇌종양 수술로 암울하던 큰언니의 은총으로 순례가 시작되었어요.
2006년 대구지부에서 예식장을 빌려서 메세지 전달행사가 있었어요.
넷째를 업고 셋째 딸아이를 안고 미사를 하는데 아가씨때부터 아팠던 고질병인 어깨가 천근만근 아팠었어요.
업은 아이가 잠들어서 바닥에 눕히고 딸을 안고 좁은 공간에 앉아서 강론을 듣고 있는데
뒤에서 자꾸 의자를 미는데 좁아도 은총 중에 있으니 기쁘게 강론을 듣고 있었는데 누가 제 등을 만지는 거에요.
그 순간 제 코로 향기가 확 뿜어져 나오는 겁니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율리아엄마께서 제 뒤에 앉아 활짝 웃으시는 거에요.
엄마께서 성체를 모시러 나오셔서 제 뒤에 앉아 계셨는데
낙태보속고통으로 배가 만삭으로 불러오시니 봉사자가 의자를 자꾸 밀었던 거에요.
아기가 너무 예뻤다고 나중에 말씀하시는데 그때 제 아픈 등짝을 쓰다듬어 주셔서 온몸이 향기로 휩싸여 치유가 되었어요.
이런 은총속에서 그날 알비노형제님의 권유로 전원마을을 신청하게 되었어요.
2005년도에 나주성모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모님동산을 지키기 위해 전원마을을 조성하자고 시작되었는데
그 뒤에 전라남도의 조례가 계속 바뀌면서 한옥마을로 조성하게 되었어요.

저는 4남매를 나주성모님의 보호아래에서 어린시절을 자라게 하고자 소박한 전원주택을 꿈꾸며 신청했는데
형편에 맞지 않게 한옥으로 지어야 되어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그래도 2010년 첫번째로 이사오게 되었어요!
가로등도 없고 비포장 도로에 TV와 인터넷이 안되는 초창기 석달 정도를 아이들과 적응하기가 너무 버거웠지만
'부르심'에 대해 묵상하며 시골생활이 시작되었지요.
기존 동네 어른들은 4남매가 있는 저희 집에 관심을 보이셨고
한옥도 한채씩 지어지면서 조금씩 마을 형태가 생겨나고
시골에서 보기 드물게 아이들이 10여명이 넘게 살게 되는 활기가 넘치는 마을이 되기 시작했어요.
여유자금이 없이 집을 짓다 보니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어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이사오면서 겪는 이해관계들
시어른과 시댁 형제들의 시선,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닥치는 사회적 종교 이념과 시선으로 인한 갈등
새로운 터전에서 경제적 자립을 위한 노력 등,
'부르심'
내가 온 것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부르셔서 온 거라고 하셨는데 ~~
처음 순례버스를 탈 때부터 눈물이 줄줄 흐르며 늘 성령충만했던 내 모습은 아득하게 사라지고
아이들 키우고 살아내느라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간것 같아요.
그러나
아이들이 하나 둘 독립하게 되니 내가 정말 성모님 보호아래 있었구나~!
이번에 셋째가 취업하고 갈바리아 예수님께 인사드리는데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정신없이 바쁘게 사느라 정성어린 감사를 드리지 못했는데도
한수제 벚꽃 송이처럼 가장 풍요롭게 채워주시는 나주성모님 은총을 느꼈습니다.
또한 성삼일 고통의 절정에 계시는 분이 순례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은총을 받게 하시려고
만남을 해 주시는 작은 영혼 엄마를 보며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그 품에 사는 우리들은 참으로 복된 자녀임을 황연대각하게 되었지요.
엄마께서 외치시는 오대영성을 제대로 실천해보리라 다짐하는 4월 첫토였습니다.
율리아 엄마 사랑합니다.
생활안에서 주님 뜻에 합당하고 겸손하게 사랑실천을 하려고 노력하는 저희들의 작은 희생을 보시고
하루빨리 한국 교회가 나주성모님을 받아들이고 자유로운 순례가 허용되도록 더 깨어 노력 해 보겠습니다. 아멘
모든 영광을 성모님을 통하여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아멘
찬미예수님
찬미성모님
광주지부 한옥 마을의 이은주 마르타입니다.
나주성모님을 마음에 모시면서 많은 이웃들의 도움을 받고 영적으로 풍요로움을 느꼈었는데
나태해진 나 자신을 반성하면서 나는 과연 40주년이 되도록 어떤 이웃이었는지
나도 누군가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천사의 역할을 해 왔는지 되돌아 보며
이 글을 읽는 모든이에게 은총으로 흘러들어가 주님 영광드러나기를 기도하며 글을 써 봅니다.
AI 활용
저는2004년 뇌종양 수술로 암울하던 큰언니의 은총으로 순례가 시작되었어요.
2006년 대구지부에서 예식장을 빌려서 메세지 전달행사가 있었어요.
넷째를 업고 셋째 딸아이를 안고 미사를 하는데 아가씨때부터 아팠던 고질병인 어깨가 천근만근 아팠었어요.
업은 아이가 잠들어서 바닥에 눕히고 딸을 안고 좁은 공간에 앉아서 강론을 듣고 있는데
뒤에서 자꾸 의자를 미는데 좁아도 은총 중에 있으니 기쁘게 강론을 듣고 있었는데 누가 제 등을 만지는 거에요.
그 순간 제 코로 향기가 확 뿜어져 나오는 겁니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율리아엄마께서 제 뒤에 앉아 활짝 웃으시는 거에요.
엄마께서 성체를 모시러 나오셔서 제 뒤에 앉아 계셨는데
낙태보속고통으로 배가 만삭으로 불러오시니 봉사자가 의자를 자꾸 밀었던 거에요.
아기가 너무 예뻤다고 나중에 말씀하시는데 그때 제 아픈 등짝을 쓰다듬어 주셔서 온몸이 향기로 휩싸여 치유가 되었어요.
이런 은총속에서 그날 알비노형제님의 권유로 전원마을을 신청하게 되었어요.
2005년도에 나주성모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모님동산을 지키기 위해 전원마을을 조성하자고 시작되었는데
그 뒤에 전라남도의 조례가 계속 바뀌면서 한옥마을로 조성하게 되었어요.
저는 4남매를 나주성모님의 보호아래에서 어린시절을 자라게 하고자 소박한 전원주택을 꿈꾸며 신청했는데
형편에 맞지 않게 한옥으로 지어야 되어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그래도 2010년 첫번째로 이사오게 되었어요!
가로등도 없고 비포장 도로에 TV와 인터넷이 안되는 초창기 석달 정도를 아이들과 적응하기가 너무 버거웠지만
'부르심'에 대해 묵상하며 시골생활이 시작되었지요.
기존 동네 어른들은 4남매가 있는 저희 집에 관심을 보이셨고
한옥도 한채씩 지어지면서 조금씩 마을 형태가 생겨나고
시골에서 보기 드물게 아이들이 10여명이 넘게 살게 되는 활기가 넘치는 마을이 되기 시작했어요.
여유자금이 없이 집을 짓다 보니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어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이사오면서 겪는 이해관계들
시어른과 시댁 형제들의 시선,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닥치는 사회적 종교 이념과 시선으로 인한 갈등
새로운 터전에서 경제적 자립을 위한 노력 등,
'부르심'
내가 온 것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부르셔서 온 거라고 하셨는데 ~~
처음 순례버스를 탈 때부터 눈물이 줄줄 흐르며 늘 성령충만했던 내 모습은 아득하게 사라지고
아이들 키우고 살아내느라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간것 같아요.
그러나
아이들이 하나 둘 독립하게 되니 내가 정말 성모님 보호아래 있었구나~!
이번에 셋째가 취업하고 갈바리아 예수님께 인사드리는데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정신없이 바쁘게 사느라 정성어린 감사를 드리지 못했는데도
한수제 벚꽃 송이처럼 가장 풍요롭게 채워주시는 나주성모님 은총을 느꼈습니다.
또한 성삼일 고통의 절정에 계시는 분이 순례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은총을 받게 하시려고
만남을 해 주시는 작은 영혼 엄마를 보며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그 품에 사는 우리들은 참으로 복된 자녀임을 황연대각하게 되었지요.
엄마께서 외치시는 오대영성을 제대로 실천해보리라 다짐하는 4월 첫토였습니다.
율리아 엄마 사랑합니다.
생활안에서 주님 뜻에 합당하고 겸손하게 사랑실천을 하려고 노력하는 저희들의 작은 희생을 보시고
하루빨리 한국 교회가 나주성모님을 받아들이고 자유로운 순례가 허용되도록 더 깨어 노력 해 보겠습니다. 아멘
모든 영광을 성모님을 통하여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