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9. 시신경이 완전히 파괴된 오른쪽 눈은 절대 안 될 것입니다
봉 안드레아 할아버지가 왼쪽 눈은 뜨셨지만 또 하나의 눈이 남아있었다. 한꺼번에 두 눈을 다 수술할 수가 없으니 먼저 한쪽 눈만 한 뒤, 나머지 한쪽 눈은 붕대를 풀고 난 후 수술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장님의 전망은 비관적이었다. “아주머니, 오른쪽 눈은 시신경이 완전히 파괴됐기 때문에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는 “예, 알겠습니다. 한쪽 눈만 보여도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러나 원장님,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한 번만 더 수술해주셔요. 저는 뒤에서 기도하겠습니다. 눈이 안 보여도 좋으니 제 소원을 좀 들어주셔요. 네?” 했다.
원장님은 “세상에, 친자식들도 부모를 외면하는 세상인데 아주머니 같은 효녀들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불가능하지만 아주머니의 그 지극한 사랑에 찬 정성으로, 예. 해 보겠습니다.”
곧바로 시신경이 완전히 파괴된 오른쪽 눈을 수술하게 되었다. 나는 ‘오른쪽 눈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예수님! 분명 오른쪽도 당신께서 친히 수술해주시어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는 단순한 믿음으로 ‘아멘!’으로 응답했다. 나는 할아버지께서 오른쪽 눈을 수술할 때도 왼쪽 눈을 할 때와 똑같은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두 번째 수술 날은 수원으로 교육을 받으러 출장갔던 장부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는 날이었다. 이사해서부터 계속 할아버지 수술을 위해 병원에 왔다 갔다 하며 계속 병원에 있다 보니, 새로 이사한 수강 아파트에 눈물 흘리신 성모님을 모셔놓은 뒤 짐 정리도 제대로 못 한 채 계속해서 집을 비워놓은 상태였다.
그간 장부까지도 집에 없었기에 내심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고, 가족들에게도 너무 미안했다. 그런 와중에도 순례자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성모님을 찾아뵙고 있었다. 장부가 도착하기 전, 집에 다녀오고자 전에 함께 성령 봉사했던 이 마리아 자매님께 할아버지를 잠시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흔쾌히 수락 해주어 할아버지가 잡수실 것을 충분히 마련해 놓고 나주 집으로 내려왔다.
오랫동안 교육을 다녀왔는데 아직도 집안이 정리가 안 되어 어지러운 채 성모님이 모셔져 있으면 얼마나 분심 들겠는가? 나는 장부를 보자마자 용서부터 청했다.
“율리오씨, 정말 미안해요. 사실은 봉일동 할아버지 눈 수술해드리고 돌봐드리느라 그간 집에 오지 못하고 함께 병원에 있었어요. 짐도 채 정리를 다 못 했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런데 율리오씨, 정말 기쁜 소식이 있어요. 할아버지가 왼쪽 눈을 뜨셨어요. 남은 오른쪽 눈 수술은 방금 끝나서 제가 잠시 올 수 있었어요.”
소식을 전하면서도 나는 혹여라도 장부가 언짢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조심스레 말을 했다. 그런데 율리오씨는 오히려 너무너무 기뻐하며 내 손을 덥석 잡고는 “아, 잘했어! 잘했어! 여보, 정말 잘했어!
주님과 성모님께서 당신의 그 정성과 지극한 사랑을 보시고 눈을 떠 주셨구만. 분명히 두 눈을 다 뜨시게 될 거야. 나도 함께 기도할게. 짐은 내가 천천히 정리할 테니까 빨리 가봐!” 하는 것이 아닌가!
장부도 그간 할아버지 댁에 같이 다니면서 봉사했기에 할아버지를 가족처럼 생각했다. 나의 든든한 협력자인 장부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기에 나는 또다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장부가 함께 기뻐해 주니 나의 기쁨은 배가 되었다. 아니, 만만 배가 되었다.
수강 아파트는 믿음직스러운 장부에게 맡기고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광주 병실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있었고, 기쁘게 희생과 보속을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다. 밤이면 할아버지 옆 협소한 보호자 침대에 누운 나는, 언제 깨실 줄 모르는 할아버지를 위해 잠자지 않고 계속 묵주를 들고 기도하면서 주님 영광 드러내시라고 구하고 찾고 두드렸다.
남은 한쪽 눈마저 무사히 수술을 마친 뒤 또다시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주님, 믿습니다.’ 하면서도 붕대 풀 날이 다가올수록 초조와 긴장감이 내게서 떠나지를 않았다. 왜냐하면 시신경이 완전히 파괴된 눈이 다시 보게 된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원장님도 비관적으로 말했지만 나는 ‘아냐, 우리 주님께서 분명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굳게 믿으며 끊임없이 생활의 기도를 바쳤다.
749. 시신경이 완전히 파괴된 오른쪽 눈은 절대 안 될 것입니다
봉 안드레아 할아버지가 왼쪽 눈은 뜨셨지만 또 하나의 눈이 남아있었다. 한꺼번에 두 눈을 다 수술할 수가 없으니 먼저 한쪽 눈만 한 뒤, 나머지 한쪽 눈은 붕대를 풀고 난 후 수술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장님의 전망은 비관적이었다. “아주머니, 오른쪽 눈은 시신경이 완전히 파괴됐기 때문에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는 “예, 알겠습니다. 한쪽 눈만 보여도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러나 원장님,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한 번만 더 수술해주셔요. 저는 뒤에서 기도하겠습니다. 눈이 안 보여도 좋으니 제 소원을 좀 들어주셔요. 네?” 했다.
원장님은 “세상에, 친자식들도 부모를 외면하는 세상인데 아주머니 같은 효녀들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불가능하지만 아주머니의 그 지극한 사랑에 찬 정성으로, 예. 해 보겠습니다.”
곧바로 시신경이 완전히 파괴된 오른쪽 눈을 수술하게 되었다. 나는 ‘오른쪽 눈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예수님! 분명 오른쪽도 당신께서 친히 수술해주시어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는 단순한 믿음으로 ‘아멘!’으로 응답했다. 나는 할아버지께서 오른쪽 눈을 수술할 때도 왼쪽 눈을 할 때와 똑같은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두 번째 수술 날은 수원으로 교육을 받으러 출장갔던 장부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는 날이었다. 이사해서부터 계속 할아버지 수술을 위해 병원에 왔다 갔다 하며 계속 병원에 있다 보니, 새로 이사한 수강 아파트에 눈물 흘리신 성모님을 모셔놓은 뒤 짐 정리도 제대로 못 한 채 계속해서 집을 비워놓은 상태였다.
그간 장부까지도 집에 없었기에 내심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고, 가족들에게도 너무 미안했다. 그런 와중에도 순례자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성모님을 찾아뵙고 있었다. 장부가 도착하기 전, 집에 다녀오고자 전에 함께 성령 봉사했던 이 마리아 자매님께 할아버지를 잠시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흔쾌히 수락 해주어 할아버지가 잡수실 것을 충분히 마련해 놓고 나주 집으로 내려왔다.
오랫동안 교육을 다녀왔는데 아직도 집안이 정리가 안 되어 어지러운 채 성모님이 모셔져 있으면 얼마나 분심 들겠는가? 나는 장부를 보자마자 용서부터 청했다.
“율리오씨, 정말 미안해요. 사실은 봉일동 할아버지 눈 수술해드리고 돌봐드리느라 그간 집에 오지 못하고 함께 병원에 있었어요. 짐도 채 정리를 다 못 했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런데 율리오씨, 정말 기쁜 소식이 있어요. 할아버지가 왼쪽 눈을 뜨셨어요. 남은 오른쪽 눈 수술은 방금 끝나서 제가 잠시 올 수 있었어요.”
소식을 전하면서도 나는 혹여라도 장부가 언짢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조심스레 말을 했다. 그런데 율리오씨는 오히려 너무너무 기뻐하며 내 손을 덥석 잡고는 “아, 잘했어! 잘했어! 여보, 정말 잘했어!
주님과 성모님께서 당신의 그 정성과 지극한 사랑을 보시고 눈을 떠 주셨구만. 분명히 두 눈을 다 뜨시게 될 거야. 나도 함께 기도할게. 짐은 내가 천천히 정리할 테니까 빨리 가봐!” 하는 것이 아닌가!
장부도 그간 할아버지 댁에 같이 다니면서 봉사했기에 할아버지를 가족처럼 생각했다. 나의 든든한 협력자인 장부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기에 나는 또다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장부가 함께 기뻐해 주니 나의 기쁨은 배가 되었다. 아니, 만만 배가 되었다.
수강 아파트는 믿음직스러운 장부에게 맡기고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광주 병실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있었고, 기쁘게 희생과 보속을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다. 밤이면 할아버지 옆 협소한 보호자 침대에 누운 나는, 언제 깨실 줄 모르는 할아버지를 위해 잠자지 않고 계속 묵주를 들고 기도하면서 주님 영광 드러내시라고 구하고 찾고 두드렸다.
남은 한쪽 눈마저 무사히 수술을 마친 뒤 또다시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주님, 믿습니다.’ 하면서도 붕대 풀 날이 다가올수록 초조와 긴장감이 내게서 떠나지를 않았다. 왜냐하면 시신경이 완전히 파괴된 눈이 다시 보게 된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원장님도 비관적으로 말했지만 나는 ‘아냐, 우리 주님께서 분명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굳게 믿으며 끊임없이 생활의 기도를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