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내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위중한 상태였다. 출혈이 계속되던 그때, 사실 내 온몸에는 이미 암세포가 퍼져 말기로 진행되고 있었으나, 나는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형편에, 결국은 겨우 아문 줄 알았던 곳에서 다시 피고름이 터져 나오고 하혈까지 겹쳤다. 나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던 셈이다.
대학병원에서 들었던 ‘장이 썩은 것 아니냐?’ 하는 의사들의 수군거림이 문득문득 떠올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하느님을 불렀고, 마음을 다시금 굳건히 다잡았다. ‘오 하느님, 저 꼭 살아야 합니다. 제가 먹는 이 약을 신약으로 바꿔주시어 부디 제 병든 육신을 치유해 주세요.
제가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불쌍한 우리 어머니와 아이들 때문에 지금은 죽을 수가 없어요. 딸로서, 또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해주시고 우리 가정을 지킬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 이렇게 간절히 기도드리면,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던 몸에 기운이 돌아 조금씩이나마 아이들을 돌보고 살림을 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께서 찾아오셨다. “어미야, 집에 있냐?” 시어머니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하던 일을 멈추고 재빨리 마당으로 나갔다. “어머니, 오셨어요?” 시어머니는 마루에 걸터앉으셨다. 나는 ‘혹시 또 돈을 달라고 오신 것일까?’ 싶어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긴장되었다. 다행히 시어머니는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으시고 다른 말씀을 하셨다.
“너, 광주 살 적에 모시고 살았던 외할머니 기억하냐?” “그럼요, 제가 어찌 할머니를 잊을 수가 있겠어요.” “외할머니가 올해로 아흔다섯이신데, 참말로 그 며느리인 올케 때문에 내가 속상해 죽겠다.” 시어머니는 시외할머니께서 며느리의 학대 때문에 견디기 힘들어하신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셨다. 듣는 내내 내 마음이 아려왔다.
할머니는 그 연세에 불도 때지 않은 차디찬 방에서 겨울을 나고 계셨다. 며느리는 외숙이 계실 때는 식사를 챙겨드리는 척하다가, 외숙만 없으면 밥도 제대로 드리지 않고 구박을 일삼는다고 했다. 가엾게도 할머니는 그 구박을 견디다 못해 큰딸인 내 시어머니댁과 큰손주 집을 전전하며 이 집 저 집 눈칫밥을 먹으며 지내셨던 것이다.
나주에 있는 큰손주 집에 계실 때는 손주며느리가 술 좋아하시는 할머니를 타박하며 술을 전혀 못 드시게 했다. 그래서 나는 큰딸을 낳은 뒤부터 가끔 없는 돈을 쪼개어 아무도 모르게 할머니를 위한 술과 안주를 사 들고 가 몰래 내드리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시며 말씀하셨다.
“아가, 너무 고맙다, 고마워. 나를 이렇게 챙겨주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구나.” 하시면서 허리춤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려 하셨다. 한사코 안 받으려는 나와 할머니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다. 내가 끝까지 거절하면 할머니는 서운함에 울음까지 터뜨리려 하셨다.
하는 수 없이 그 돈을 받아들었다가 나중에 더 보태어 다시 술과 안주를 사다 드리곤 했다. 그것은 우리 둘만이 아는 소중하고 따뜻한 추억이었다. 광주 시댁에서 살 때도 나는 시외할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열여섯 대식구의 살림을 다 마치고 모두가 잠든 늦은 밤이면, 나는 할머니 방에 들어가 말동무도 해드리고 고단한 몸을 안마해 드렸다.
할머니는 그때마다 아이처럼 좋아하시며 말씀하셨다. “너는 하늘에서 떨어졌냐, 땅에서 솟아났냐? 어찌 너같이 착한 것이 다 있다냐. 네 시어미 좋으려고 복덩이가 들어왔네.” 시어머니는 내가 시외할머니와 얼마나 서로 아끼며 지냈는지, 또 할머니가 나를 얼마나 의지하셨는지 잘 알고 계셨기에 결국 나에게 할머니를 맡기고 싶어 오신 것이었다.
그 당시 나의 상태는, 다행히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배의 통증이 여전했고 건강은 이미 속수무책으로 망가진 상태라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조차 버거웠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시외할머니가 홀대당하고 계신다는 소리를 들으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홀대받는 할머니가 너무 불쌍해서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찍 돌아가신 보고 싶은 아버지를 모시는 셈 치고 모셔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당시 나는 이미 말기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시골 재래식 환경에서 네 아이와 남편 뒷바라지까지 감당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시외할머니를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불타올랐다. 나는 시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님, 할머님을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와 주세요. 제가 모실게요.” 그러자 시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셨다. “그래, 그러면 내일 당장 모시고 오마.” “예, 어머니!” 내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어머니는 바로 자리를 뜨셨다.
“며느리의 학대 때문에 견디기 어려워하신다고 말씀하셨다.”
wlsgodqn님 주님께서 예비하신 삶 묵상 프로젝트 은총의 글 올려주심에 너무나도 감사드려요~
wlsgodqn님과 그 가정에 축복이 가득하시고 항상 영육간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7월 1일 성모님의 눈물 흘리신 38주년 기념 기도회 및 첫토 기도회에 꼭 뵈어요~
나주 순례 꾸준히 다니시고 앞으로도 모든 일 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거짓 공지문과 PD수첩과 TV 조선의 탐사보도 세븐거짓 방송등으로 마리아의 구원방주에서
내리는 일 없이 예수님과 성모님을 따라서 5대 영성으로 무장하여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어서 빨리 나주성모님 인준과 극심한 고통을 봉헌하시는 율리아 엄마의 빠른 회복과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율리아 엄마를 33세 로 만들어 주시어 세계 각처에서
메시지와 5대 영성 전파로 모든이가 마리아의 구원방주에 승선하도록 해주소서~
천국에서 계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나주성모님 인준을 위하여 전구해 주소서~
주여 영광과 찬미를 영원히 받으소서~ 성모님 기쁨만 가득하소서~ 아멘! 알렐루야~ ♡♡♡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시외할머니를 모시리
나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내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위중한 상태였다. 출혈이 계속되던 그때, 사실 내 온몸에는 이미 암세포가 퍼져 말기로 진행되고 있었으나, 나는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형편에, 결국은 겨우 아문 줄 알았던 곳에서 다시 피고름이 터져 나오고 하혈까지 겹쳤다. 나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던 셈이다.
대학병원에서 들었던 ‘장이 썩은 것 아니냐?’ 하는 의사들의 수군거림이 문득문득 떠올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하느님을 불렀고, 마음을 다시금 굳건히 다잡았다. ‘오 하느님, 저 꼭 살아야 합니다. 제가 먹는 이 약을 신약으로 바꿔주시어 부디 제 병든 육신을 치유해 주세요.
제가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불쌍한 우리 어머니와 아이들 때문에 지금은 죽을 수가 없어요. 딸로서, 또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해주시고 우리 가정을 지킬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 이렇게 간절히 기도드리면,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던 몸에 기운이 돌아 조금씩이나마 아이들을 돌보고 살림을 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께서 찾아오셨다. “어미야, 집에 있냐?” 시어머니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하던 일을 멈추고 재빨리 마당으로 나갔다. “어머니, 오셨어요?” 시어머니는 마루에 걸터앉으셨다. 나는 ‘혹시 또 돈을 달라고 오신 것일까?’ 싶어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긴장되었다. 다행히 시어머니는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으시고 다른 말씀을 하셨다.
“너, 광주 살 적에 모시고 살았던 외할머니 기억하냐?” “그럼요, 제가 어찌 할머니를 잊을 수가 있겠어요.” “외할머니가 올해로 아흔다섯이신데, 참말로 그 며느리인 올케 때문에 내가 속상해 죽겠다.” 시어머니는 시외할머니께서 며느리의 학대 때문에 견디기 힘들어하신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셨다. 듣는 내내 내 마음이 아려왔다.
할머니는 그 연세에 불도 때지 않은 차디찬 방에서 겨울을 나고 계셨다. 며느리는 외숙이 계실 때는 식사를 챙겨드리는 척하다가, 외숙만 없으면 밥도 제대로 드리지 않고 구박을 일삼는다고 했다. 가엾게도 할머니는 그 구박을 견디다 못해 큰딸인 내 시어머니댁과 큰손주 집을 전전하며 이 집 저 집 눈칫밥을 먹으며 지내셨던 것이다.
나주에 있는 큰손주 집에 계실 때는 손주며느리가 술 좋아하시는 할머니를 타박하며 술을 전혀 못 드시게 했다. 그래서 나는 큰딸을 낳은 뒤부터 가끔 없는 돈을 쪼개어 아무도 모르게 할머니를 위한 술과 안주를 사 들고 가 몰래 내드리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시며 말씀하셨다.
“아가, 너무 고맙다, 고마워. 나를 이렇게 챙겨주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구나.” 하시면서 허리춤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려 하셨다. 한사코 안 받으려는 나와 할머니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다. 내가 끝까지 거절하면 할머니는 서운함에 울음까지 터뜨리려 하셨다.
하는 수 없이 그 돈을 받아들었다가 나중에 더 보태어 다시 술과 안주를 사다 드리곤 했다. 그것은 우리 둘만이 아는 소중하고 따뜻한 추억이었다. 광주 시댁에서 살 때도 나는 시외할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열여섯 대식구의 살림을 다 마치고 모두가 잠든 늦은 밤이면, 나는 할머니 방에 들어가 말동무도 해드리고 고단한 몸을 안마해 드렸다.
할머니는 그때마다 아이처럼 좋아하시며 말씀하셨다. “너는 하늘에서 떨어졌냐, 땅에서 솟아났냐? 어찌 너같이 착한 것이 다 있다냐. 네 시어미 좋으려고 복덩이가 들어왔네.” 시어머니는 내가 시외할머니와 얼마나 서로 아끼며 지냈는지, 또 할머니가 나를 얼마나 의지하셨는지 잘 알고 계셨기에 결국 나에게 할머니를 맡기고 싶어 오신 것이었다.
그 당시 나의 상태는, 다행히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배의 통증이 여전했고 건강은 이미 속수무책으로 망가진 상태라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조차 버거웠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시외할머니가 홀대당하고 계신다는 소리를 들으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홀대받는 할머니가 너무 불쌍해서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찍 돌아가신 보고 싶은 아버지를 모시는 셈 치고 모셔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당시 나는 이미 말기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시골 재래식 환경에서 네 아이와 남편 뒷바라지까지 감당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시외할머니를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불타올랐다. 나는 시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님, 할머님을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와 주세요. 제가 모실게요.” 그러자 시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셨다. “그래, 그러면 내일 당장 모시고 오마.” “예, 어머니!” 내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어머니는 바로 자리를 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