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나를 살리시기 위한 하느님의 손길
“아가, 아가! 어서 일어나봐. 이것이 뭔 일이라냐. 응?” 어렴풋이 통곡하고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하고 깨어나 보니 친정집에 가셨던 어머니가 돌아와 나를 붙들고 울고 계셨다. 남편 월급날이면 여지없이 시어머니가 오시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나는 친정어머니를 항상 그날만은 집에 계시지 않도록 했었다.
그래서 친정어머니는 내일 오시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못 견디게 오고 싶어서 오셨다는 것이다. 내가 애타게 하느님을 부를 때 아마도 하느님께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 친정어머니께서 오시도록 불러주셨으리라. 친정어머니가 집에 오시자마자 넷째 아이가 울고 있어서 큰아이들에게 “엄마는?” 하니까 모른다고 했다 한다,
어머니는 다른 생각을 하실 겨를도 없이 급히 아이 분유부터 타서 먹이시려고 나왔다가 온몸이 흙먼지투성이로 엉망이 되어 쓰러진 나를 발견하신 것이다. 그때 첫째, 둘째가 다 학교에서 돌아왔지만, 다행히 하느님께서 지켜주시어 부엌에서 쓰러진 엄마를 보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는 피가 나는 내 손과 무릎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시고, 몸도 깨끗이 씻겨주신 후, 깨끗한 옷을 입혀 부축하여 방으로 데려가셨다. 어머니에 도움을 받아 자리에 누우니 어머니께선 다정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야, 아무 걱정말고 편히 좀 쉬거라. 아이들과 집안일은 내가 다 돌보마.” 하시더니 “어여 눈 좀 붙이거라.” 하시며 방을 나가셨다.
항상 그러셨지만, 이번에도 어머니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남편 월급날이니 시어머니가 오셨다 가셨음을 짐작하셨을 것이 분명하지만, 단 한마디의 말씀도 없이 묵묵히 내 곁을 지켜주셨다. 어머니께 너무나 감사하면서도 그 마음이 얼마나 저리고 아프실까를 생각하니 눈물이 어느덧 베갯잇을 적시고 있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셔야만 하는 내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보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나의 이 비참한 심경. 한 생을 나 하나 위해 바쳐오신 어머니는 지금 이 순간도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계셨다. ‘오늘 동네 곳곳을 들려 빌려온 빚도 결국 어머니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갚을 방법이 없는데... 어쩌면 좋아.’
어머니께 너무나 죄송해서 나는 끝내, 소리는 내지 못하고 울고 말았다. 내 몸이 건강하기라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몸이 아프니 일을 못 해 돈을 벌 수도 없고, 병원비마저 친정어머니가 어렵게 다 대주시는 형편이라 나는 수중에 돈 한 푼 없었다. 아픈 딸을 돌보는 어머니께 대한 죄송함과 아이들조차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나의 상황...
돈이 없어 마주하는 수많은 어려움에, 나는 모든 것이 아픈 내 탓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여린 내 가슴은 미어질 듯 아니, 갈가리 찢어지는 듯 아파 왔다. 그동안 시어머니는 나에게 매번 아들 월급의 몇십 배씩도 아주 쉽게 달라고 하여 많은 돈을 가져가셨다. 그러면 아쉬운 소리 전혀 못 해본 내가 어쩔 수 없이 여기저기에 손 벌려 어렵게 빌려드리곤 했다.
시아버님의 많은 빚보증, 시어머니의 많은 빚보증들까지도 “네가 큰 며느리이니 네가 알아서 다 해야 된다.” 하셔서 내가 다 갚아드리지 않았던가! 큰 며느리라는 미명 아래 우리 어머니가 빚까지 내서 넉넉히 해주신 그 많은 혼수 살림들까지 다 가져가시고 숟가락 하나도 주지 않으셨는데...
그리고 빚보증뿐만 아니라, 시어머님이 쓰신 모든 빚이나 빌린 돈들도 내가 다 갚아드렸지 않은가! 받기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큰 며느리라고 내가 받아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을 때는 모든 것을 내가 다 해야 했다. 큰돈은 이모님께 부탁하여 빚내어 드렸는데, 그 큰돈들도 안 갚으시니 원금과 이자를 내가 다 돈 벌어서 다 갚아야 했다.
그러나 내가 아프게 되자 그 엄청난 빚들은 고스란히 친정어머니의 부담이 되었다. 시어머니는 단 한 번도 빌린 그 돈들을 갚아보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친정어머니는 나에게 결혼해서 홍어만 사주면 된다고 하셨지만, 홍어 한 번도 못 사드렸다. 홍어 한 번 못 얻어 드시고, 아픈 딸과 시댁 뒷바라지하시느라 고생만 하신 내 어머니!
돈 한 번 빌릴 때마다 드는 어머니께 대한 죄송함은 내 여린 마음이 찢어져 피 흘리는, 아니, 천 갈래, 만 갈래 찢기어 생살을 헤집는 아픔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픔도 무릅쓴 채, 끊임없이 돈을 달라시는 시어머니의 요구를 다 채워드려야만 했다.
이제까지 죽어가면서도 내 몸 한번 사리지 않고 시댁을 위해 바쳐왔던 지난날들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쓰라린 기억의 지평선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도, 또 여전히 당연하게 돈을 받아가셔야만 했던 시어머님을 위해 눈물로 기고, 기어서 달리기를 해야만 했던 거칠고 또 거친 시골길은 어떠했는가!
그렇게까지 해드렸는데도 또 우리 어머니를 욕되게 한 것은 사랑받은 셈 치기가 힘들었지만, 그러나 “어미야, 아픈 몸으로 큰돈 마련하느라 수고했다. 필요한데 요긴하게 잘 쓰마.” 하시는 시어머니의 다정한 사랑의 말을 들은 셈 치고 봉헌했다. 그리고 문을 꽝 닫고 마룻장을 꽝꽝 두들기시는 것은 사랑으로 나를 다독여주시는 셈 치고 봉헌했다.
그러나 눈에서 흐르는 이슬방울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렇게 수많은 눈물을 흘렸건만, 눈물은 마르지도 않는가? 그러나 눈물을 흘리다가도 남편이 들어오면 아무 일 없는 듯 웃어주니 그이는 내가 아프거나 고통스러운 것을 새까맣게 몰랐다.
시어머니가 그토록 나를 힘들게 하셨어도 나는 그이에게 단 한 번도 그 어떤 불평이나 티를 낸 적도 없다. 그이가 건강한 사람에게 요구하듯 하는 요구들도 그 어느 것 하나도 거절치 않고 남편의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면서 내 모든 최선을 다해 들어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해맑게 자라도록 용기를 주기 위해,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던 나날들! 큰딸은 그런 내 곁에서 늘 함께 해주며 굳어지는 나를 주물러 주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흘러내리면 큰딸은 “엄마, 울지 마.”라고 하면서 따라 울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애써 눈물을 감추며 “엄마 울지 않아.” 하고 말했다.
큰딸이 애써 감추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애틋한 목소리로 “그럼 이게 뭐야?” 하면, 나는 “눈에 티가 들어가서 그래.” 하며 아닌 척을 하고 웃어주었다. 하지만 이미 엄마의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던 딸은 “아니야, 엄마가 너무 아픈데도 아빠가 안 들어오시니까 그렇지? 엄마, 내가 아빠 대신 엄마 안 아프게 해줄게. 울지 마, 응?” 하면서 어린 것이 그렇게 내 마음을 찡하게 울리곤 했다.
나는 이토록 눈물겹게 연명해 나가고 있는 비참하고 초라한 내 삶이 너무 버거워 어쩔 땐 죽고 싶은 마음도 들려 했다. 하지만 늘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은 셈 치고 봉헌하면서 굳건히 견디어 나갔다. 이렇게까지 사랑으로 내 곁에서 위로해주는 천사 같은 딸아이와 어린아이들, 어머니 때문에도 절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죽는다면 남편은 재혼할 텐데, 그러면 4명의 아이들은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친정어머니께 남겨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더욱 필사적으로 살아야 했다. 나는 사랑받아 건강하게 회복한 셈 치며 다시 힘을 내어 잘살아 보려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죽어가는 나를 살리시기 위한 하느님의 손길
“아가, 아가! 어서 일어나봐. 이것이 뭔 일이라냐. 응?” 어렴풋이 통곡하고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하고 깨어나 보니 친정집에 가셨던 어머니가 돌아와 나를 붙들고 울고 계셨다. 남편 월급날이면 여지없이 시어머니가 오시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나는 친정어머니를 항상 그날만은 집에 계시지 않도록 했었다.
그래서 친정어머니는 내일 오시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못 견디게 오고 싶어서 오셨다는 것이다. 내가 애타게 하느님을 부를 때 아마도 하느님께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 친정어머니께서 오시도록 불러주셨으리라. 친정어머니가 집에 오시자마자 넷째 아이가 울고 있어서 큰아이들에게 “엄마는?” 하니까 모른다고 했다 한다,
어머니는 다른 생각을 하실 겨를도 없이 급히 아이 분유부터 타서 먹이시려고 나왔다가 온몸이 흙먼지투성이로 엉망이 되어 쓰러진 나를 발견하신 것이다. 그때 첫째, 둘째가 다 학교에서 돌아왔지만, 다행히 하느님께서 지켜주시어 부엌에서 쓰러진 엄마를 보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는 피가 나는 내 손과 무릎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시고, 몸도 깨끗이 씻겨주신 후, 깨끗한 옷을 입혀 부축하여 방으로 데려가셨다. 어머니에 도움을 받아 자리에 누우니 어머니께선 다정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야, 아무 걱정말고 편히 좀 쉬거라. 아이들과 집안일은 내가 다 돌보마.” 하시더니 “어여 눈 좀 붙이거라.” 하시며 방을 나가셨다.
항상 그러셨지만, 이번에도 어머니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남편 월급날이니 시어머니가 오셨다 가셨음을 짐작하셨을 것이 분명하지만, 단 한마디의 말씀도 없이 묵묵히 내 곁을 지켜주셨다. 어머니께 너무나 감사하면서도 그 마음이 얼마나 저리고 아프실까를 생각하니 눈물이 어느덧 베갯잇을 적시고 있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셔야만 하는 내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보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나의 이 비참한 심경. 한 생을 나 하나 위해 바쳐오신 어머니는 지금 이 순간도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계셨다. ‘오늘 동네 곳곳을 들려 빌려온 빚도 결국 어머니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갚을 방법이 없는데... 어쩌면 좋아.’
어머니께 너무나 죄송해서 나는 끝내, 소리는 내지 못하고 울고 말았다. 내 몸이 건강하기라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몸이 아프니 일을 못 해 돈을 벌 수도 없고, 병원비마저 친정어머니가 어렵게 다 대주시는 형편이라 나는 수중에 돈 한 푼 없었다. 아픈 딸을 돌보는 어머니께 대한 죄송함과 아이들조차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나의 상황...
돈이 없어 마주하는 수많은 어려움에, 나는 모든 것이 아픈 내 탓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여린 내 가슴은 미어질 듯 아니, 갈가리 찢어지는 듯 아파 왔다. 그동안 시어머니는 나에게 매번 아들 월급의 몇십 배씩도 아주 쉽게 달라고 하여 많은 돈을 가져가셨다. 그러면 아쉬운 소리 전혀 못 해본 내가 어쩔 수 없이 여기저기에 손 벌려 어렵게 빌려드리곤 했다.
시아버님의 많은 빚보증, 시어머니의 많은 빚보증들까지도 “네가 큰 며느리이니 네가 알아서 다 해야 된다.” 하셔서 내가 다 갚아드리지 않았던가! 큰 며느리라는 미명 아래 우리 어머니가 빚까지 내서 넉넉히 해주신 그 많은 혼수 살림들까지 다 가져가시고 숟가락 하나도 주지 않으셨는데...
그리고 빚보증뿐만 아니라, 시어머님이 쓰신 모든 빚이나 빌린 돈들도 내가 다 갚아드렸지 않은가! 받기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큰 며느리라고 내가 받아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을 때는 모든 것을 내가 다 해야 했다. 큰돈은 이모님께 부탁하여 빚내어 드렸는데, 그 큰돈들도 안 갚으시니 원금과 이자를 내가 다 돈 벌어서 다 갚아야 했다.
그러나 내가 아프게 되자 그 엄청난 빚들은 고스란히 친정어머니의 부담이 되었다. 시어머니는 단 한 번도 빌린 그 돈들을 갚아보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친정어머니는 나에게 결혼해서 홍어만 사주면 된다고 하셨지만, 홍어 한 번도 못 사드렸다. 홍어 한 번 못 얻어 드시고, 아픈 딸과 시댁 뒷바라지하시느라 고생만 하신 내 어머니!
돈 한 번 빌릴 때마다 드는 어머니께 대한 죄송함은 내 여린 마음이 찢어져 피 흘리는, 아니, 천 갈래, 만 갈래 찢기어 생살을 헤집는 아픔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픔도 무릅쓴 채, 끊임없이 돈을 달라시는 시어머니의 요구를 다 채워드려야만 했다.
이제까지 죽어가면서도 내 몸 한번 사리지 않고 시댁을 위해 바쳐왔던 지난날들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쓰라린 기억의 지평선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도, 또 여전히 당연하게 돈을 받아가셔야만 했던 시어머님을 위해 눈물로 기고, 기어서 달리기를 해야만 했던 거칠고 또 거친 시골길은 어떠했는가!
그렇게까지 해드렸는데도 또 우리 어머니를 욕되게 한 것은 사랑받은 셈 치기가 힘들었지만, 그러나 “어미야, 아픈 몸으로 큰돈 마련하느라 수고했다. 필요한데 요긴하게 잘 쓰마.” 하시는 시어머니의 다정한 사랑의 말을 들은 셈 치고 봉헌했다. 그리고 문을 꽝 닫고 마룻장을 꽝꽝 두들기시는 것은 사랑으로 나를 다독여주시는 셈 치고 봉헌했다.
그러나 눈에서 흐르는 이슬방울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렇게 수많은 눈물을 흘렸건만, 눈물은 마르지도 않는가? 그러나 눈물을 흘리다가도 남편이 들어오면 아무 일 없는 듯 웃어주니 그이는 내가 아프거나 고통스러운 것을 새까맣게 몰랐다.
시어머니가 그토록 나를 힘들게 하셨어도 나는 그이에게 단 한 번도 그 어떤 불평이나 티를 낸 적도 없다. 그이가 건강한 사람에게 요구하듯 하는 요구들도 그 어느 것 하나도 거절치 않고 남편의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면서 내 모든 최선을 다해 들어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해맑게 자라도록 용기를 주기 위해,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던 나날들! 큰딸은 그런 내 곁에서 늘 함께 해주며 굳어지는 나를 주물러 주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흘러내리면 큰딸은 “엄마, 울지 마.”라고 하면서 따라 울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애써 눈물을 감추며 “엄마 울지 않아.” 하고 말했다.
큰딸이 애써 감추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애틋한 목소리로 “그럼 이게 뭐야?” 하면, 나는 “눈에 티가 들어가서 그래.” 하며 아닌 척을 하고 웃어주었다. 하지만 이미 엄마의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던 딸은 “아니야, 엄마가 너무 아픈데도 아빠가 안 들어오시니까 그렇지? 엄마, 내가 아빠 대신 엄마 안 아프게 해줄게. 울지 마, 응?” 하면서 어린 것이 그렇게 내 마음을 찡하게 울리곤 했다.
나는 이토록 눈물겹게 연명해 나가고 있는 비참하고 초라한 내 삶이 너무 버거워 어쩔 땐 죽고 싶은 마음도 들려 했다. 하지만 늘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은 셈 치고 봉헌하면서 굳건히 견디어 나갔다. 이렇게까지 사랑으로 내 곁에서 위로해주는 천사 같은 딸아이와 어린아이들, 어머니 때문에도 절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죽는다면 남편은 재혼할 텐데, 그러면 4명의 아이들은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친정어머니께 남겨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더욱 필사적으로 살아야 했다. 나는 사랑받아 건강하게 회복한 셈 치며 다시 힘을 내어 잘살아 보려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