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할머니가 개 한 마리를
내가 아무것도 먹지를 못하니, 친정어머니께서 농사일로 그 바쁜 와중에도 별것 별것을 다 해다 주셨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소화되지 않아 토하기만 했다. 전대병원에 입원했던 그 당시, 배 속에 거즈가 들어있었기에 수술 후에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토하고만 있을 때 같은 병실 환자가 사랑으로 권했던 보신탕은 넘길 수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어쩌면 보신탕만은 조금이라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 때문에 고생하시는 어머니께 차마 말씀은 못 드렸다. 이렇게 못 먹고 아픈데도, 돈이 없으니 그나마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보신탕마저 사 먹지도 못하고 먹은 셈 치고 봉헌하고만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내가 아프다는 것을 들으신 시골 시할머니께서 몸보신하라고 개 한 마리를 잡아 정성껏 고를 내오시고, 고깃감으로도 조금 가져오셨다. 입원했을 때, 시어머니는 고기 한 근으로 보신탕을 해주시면서도 고깃값에 양념값, 차비까지 다 받으시며 그렇게 힘들게 하셨었다.
그런데 시할머니는 내가 아픈 것도 말씀도 드리지 않았는데, 돈 한 푼도 안 받으시고 개 한 마리를 통째로 해오시니, 시할머니의 사랑과 정성에 눈물이 나게 감사했다. 내가 성당에 다니지 못하게 하셨던 시할머니는 시작은어머니의 꼬임에 넘어가 시어머니와 짜고 나를 내쫓아내기 위해 점쟁이에게 나를 데리고 가셨었다.
그때 도리어 점쟁이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은 뒤로는 이처럼 나에게 아주 잘 해주셨다. 친정어머니께선 시할머니께서 해주신 고깃감으로 지극 정성으로 보신탕을 끓여주셨다. 그러나 모처럼 먹게 된 보신탕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전혀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모두 다 토해냈다. 그러니 그것은 어머니 드시게 했다.
그리고 고를 내오신 것도 삼키기만 해도 바로 토해버리니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또다시 꺼내어 먹으려고 끓였다가, 먹으면 또 토해서 못 먹고 다시 냉장고에 넣기를 계속 반복했다. 그리고 상할까 싶어, 시간이 되면 끓이기를 계속 반복했다. 한 달 이상을 그렇게 하다 보니 고약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서 결국은 완전히 맹물이 되어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상식적으로는 자꾸 끓이면 졸여지니 진해져야 하는 것이 맞는데 냄새가 고약한 맹물이 되다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깝다고 상한 것을 먹을 수는 없으니, 시할머니께서 정성 가득한 사랑으로 해다 주신 고를 먹지 못하고 버려야 했다.
그렇지만, 시할머니가 해오신 고기와 고의 모든 영양분이 시할머니와 우리 가족들에게 온전히 흡수되게 해주시라고 하느님께 청하며 먹은 셈 치고 봉헌했다. 비록 먹지는 못했지만, 세월이 지나도 시할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평생 그 한 가지 해주신 것이었지만, 지금도 그 기억을 떠올리면 어찌나 감사한지! 나는 시할머니의 그 단 한 번의 도움과 사랑을 끝까지 잊지 않았다. 그래서 훗날 주님께서 암을 치유해주시어 내가 건강을 되찾게 되었을 때, 시할머니가 한 번씩 우리 집에 오시면 좋아하시는 것은 뭐든지 다 해드렸다.
옷도 몇 벌씩 사드리고, 잡수실 것도 많이 챙겨드리는 등, 계속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마음 써드리고 도와드렸다. 그러다 거동을 못 하시게 되자, 우리 집에서 가까운 나주 요양 병원에 모시고 자주 찾아가 뵈었다. 내가 맛있는 것을 들고 가서, 기도하면서 먹여드리고 주물러드리며 말동무 되어드리면 시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그러던 어느 날, 시할머니께 가서 기도해드리고 온 다음 날에 시할머니는 선종하셨다. 임종 준비를 직접 해드린 것은 아니었지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드리고 왔는데, 그렇게 임종 준비까지 해드리게 된 것이었다. 나로서는 시할머니께 내 모든 최선을 다했지만, 그래도 돌아가시고 난 후에 더 못해 드린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프던지...
시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시할머니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봉헌드리며, 그 뒤 시할머니가 생각날 때마다도 주님, 성모님 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실 수 있기를 생활의 기도로 간절히 기도드렸다.
시골 할머니가 개 한 마리를
내가 아무것도 먹지를 못하니, 친정어머니께서 농사일로 그 바쁜 와중에도 별것 별것을 다 해다 주셨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소화되지 않아 토하기만 했다. 전대병원에 입원했던 그 당시, 배 속에 거즈가 들어있었기에 수술 후에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토하고만 있을 때 같은 병실 환자가 사랑으로 권했던 보신탕은 넘길 수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어쩌면 보신탕만은 조금이라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 때문에 고생하시는 어머니께 차마 말씀은 못 드렸다. 이렇게 못 먹고 아픈데도, 돈이 없으니 그나마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보신탕마저 사 먹지도 못하고 먹은 셈 치고 봉헌하고만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내가 아프다는 것을 들으신 시골 시할머니께서 몸보신하라고 개 한 마리를 잡아 정성껏 고를 내오시고, 고깃감으로도 조금 가져오셨다. 입원했을 때, 시어머니는 고기 한 근으로 보신탕을 해주시면서도 고깃값에 양념값, 차비까지 다 받으시며 그렇게 힘들게 하셨었다.
그런데 시할머니는 내가 아픈 것도 말씀도 드리지 않았는데, 돈 한 푼도 안 받으시고 개 한 마리를 통째로 해오시니, 시할머니의 사랑과 정성에 눈물이 나게 감사했다. 내가 성당에 다니지 못하게 하셨던 시할머니는 시작은어머니의 꼬임에 넘어가 시어머니와 짜고 나를 내쫓아내기 위해 점쟁이에게 나를 데리고 가셨었다.
그때 도리어 점쟁이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은 뒤로는 이처럼 나에게 아주 잘 해주셨다. 친정어머니께선 시할머니께서 해주신 고깃감으로 지극 정성으로 보신탕을 끓여주셨다. 그러나 모처럼 먹게 된 보신탕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전혀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모두 다 토해냈다. 그러니 그것은 어머니 드시게 했다.
그리고 고를 내오신 것도 삼키기만 해도 바로 토해버리니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또다시 꺼내어 먹으려고 끓였다가, 먹으면 또 토해서 못 먹고 다시 냉장고에 넣기를 계속 반복했다. 그리고 상할까 싶어, 시간이 되면 끓이기를 계속 반복했다. 한 달 이상을 그렇게 하다 보니 고약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서 결국은 완전히 맹물이 되어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상식적으로는 자꾸 끓이면 졸여지니 진해져야 하는 것이 맞는데 냄새가 고약한 맹물이 되다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깝다고 상한 것을 먹을 수는 없으니, 시할머니께서 정성 가득한 사랑으로 해다 주신 고를 먹지 못하고 버려야 했다.
그렇지만, 시할머니가 해오신 고기와 고의 모든 영양분이 시할머니와 우리 가족들에게 온전히 흡수되게 해주시라고 하느님께 청하며 먹은 셈 치고 봉헌했다. 비록 먹지는 못했지만, 세월이 지나도 시할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평생 그 한 가지 해주신 것이었지만, 지금도 그 기억을 떠올리면 어찌나 감사한지! 나는 시할머니의 그 단 한 번의 도움과 사랑을 끝까지 잊지 않았다. 그래서 훗날 주님께서 암을 치유해주시어 내가 건강을 되찾게 되었을 때, 시할머니가 한 번씩 우리 집에 오시면 좋아하시는 것은 뭐든지 다 해드렸다.
옷도 몇 벌씩 사드리고, 잡수실 것도 많이 챙겨드리는 등, 계속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마음 써드리고 도와드렸다. 그러다 거동을 못 하시게 되자, 우리 집에서 가까운 나주 요양 병원에 모시고 자주 찾아가 뵈었다. 내가 맛있는 것을 들고 가서, 기도하면서 먹여드리고 주물러드리며 말동무 되어드리면 시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그러던 어느 날, 시할머니께 가서 기도해드리고 온 다음 날에 시할머니는 선종하셨다. 임종 준비를 직접 해드린 것은 아니었지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드리고 왔는데, 그렇게 임종 준비까지 해드리게 된 것이었다. 나로서는 시할머니께 내 모든 최선을 다했지만, 그래도 돌아가시고 난 후에 더 못해 드린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프던지...
시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시할머니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봉헌드리며, 그 뒤 시할머니가 생각날 때마다도 주님, 성모님 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실 수 있기를 생활의 기도로 간절히 기도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