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사랑했던 할머니를 보내야 하는 쓰라린 아픔
시외갓댁에 도착해, 한달음에 할머니가 계신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싸늘해지신 할머니를 보자 힘이 털썩 풀리며 할머니를 붙들고 오열하며 울고 말았다. 더는 대답이 없으신 할머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할머니... 조금만 더 계시지, 우리 꼭 다시 함께 살기로 했잖아요.
이렇게 먼저 가시면 저는 어떡해요.” 하며 통곡을 하는데, 옆에 계신 시어머니도 눈물을 훔치시며 “이제 그만 울어라.” 하셨다. 할머니께서는 96세에 돌아가셨기에 다들 호상이라고 했다. 그랬기에 우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나만은 너무나 슬퍼 눈물을 멈출 줄 몰랐다. 나를 떠나기 싫어 그리도 나의 손을 놓지 못하고 슬프게 우시던 사랑하는 내 할머니!
그토록 나를 붙들고 우시던 시외할머니의 따뜻했던 손은 이제는 차갑게 온기를 잃은 채 힘없이 떨어지며 더는 나를 붙들지도 못하셨다. “할머니, 저 어떡하면 좋아요? 이제 할머니 없이 저야말로 어찌 살아요. 기다리시기로 저와 약속했는데 이리 먼저 먼 길을 가시면 어떡해요. 흐흐흑...” 주체할 수 없이 울고 있는 내게 할머니와의 추억이 새록새록 찾아와 더 눈물이 났다.
나는 그동안 여기서도, 저기서도, 그토록 홀대당하시는 시외할머니를 생각할 때면 너무 가엽고 또 보고 싶어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짠했다. 시외할머니와 광주 시댁에서 함께 살기 전, 나주 손주며느리 집에 계실 때부터 늘 시어머니 돈 대드리며 돈이 없는 와중에도 내가 먹지 않고 아껴가며 조금씩 돈을 모아 나는 한 번씩 할머니 잡수실 술과 안주를 사서 찾아뵈었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너무 기뻐하시며 소중하게 간직해오신 쌈짓돈을 치마를 걷고 허리춤에서 꺼내어 내게 가만히 쥐여 주시곤 했다. 처음에는 절대로 받지 않으려고 뿌리쳤으나 할머니가 우시는 바람에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거절치 않고 받아서 그에 더 보태어 항상 무엇이든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술과 안주를 사다 드리곤 했었다.
할머니가 나와 더 가까워지자, 조용히 “아가, 혹시 너 술 좋아하냐?”하고 물으셨다. 그래서 “네? 할머니, 저는 술을 전혀 못 해요. 막걸리만 걸러도 술 취해서 쓰러져요. 몇 번이나 쓰러졌는걸요.” 했더니 깜짝 놀라시며 말씀하셨다. “우메 시상에. 너는 혼자 컸는디 어쩌면 그렇게 어른 공경할 줄도 안다냐? 술을 좋아 안 하면 술 권할 줄도 모르는 것인디.”
하시며 글썽이시며 “내가 술을 좋아하는데 술 먹고 싶다고 해도 손주며느리가 안 사다 주더라. 그런디 술도 안 좋아하는 네가 어찌 알고 사다 준다냐?” 하시며 우셨다. 연세 드신 할머니가 시장에 가시기도 어려우시니 한두 번씩 간혹 부탁하시는데도, 손주며느리는 들은 척도 안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냉대만 당하시던 시외할머니는 내가 할머니한테 갈 때마다 너무 기뻐 고마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사실, 시외할머니의 딸인 시어머니는 항상 내게 “혼자 옹호받고 커서 저런다.”며 자주 구박을 하셨지만, 시외할머니는 전혀 딸과는 다르게 “아가, 너는 홀어머니 밑에 혼자 커도 양친 멀쩡히 살아있는 식구 많은 집 자슥보다 어찌 그리도 훨씬 더 잘한다냐.” 하셨다.
시외할머니는 정말 천사 같고 아기같이 너무나 예쁜 할머니였다. 나는 원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예뻐하고 사랑하기도 했지만, 내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해 잘 해드렸기에 어르신들 중에는 나와 나쁘신 분들이 한 분도 없었다. 쇠꼬챙이 할아버지와도 그렇게 깊은 사랑의 정을 나누며 행복하게 지내지 않았는가!
결국 내가 사랑으로 잘하면 그 사랑이 메아리로 되돌아온다고 생각한다. 외롭고 고독한 시외할머니셨지만 내가 모시고 살 때 할머니도 행복하시고, 나는 몸은 힘들어도 사랑을 나누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계실 때, “아가, 네 덕에 나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야.”
하며 그렇게 아이같이 해맑게 웃으시며 기뻐하시니, 나도 덩달아 너무너무 기쁘게 사랑을 나누며 살았다. 그러나 이제 할머니는 가셨으니, 나는 내가 숨 쉬고 살아있는 동안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안집 할아버지 부부를 돌아가신 시외할머니인 셈 치고, 또 부모님인 셈 치고 존경과 사랑으로 최선을 다해 마음 써드리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우리 큰아들이 6~7살 때 시외할머니를 모셨으니 이 글을 쓰는 지금, 시외할머니께서 이 세상을 떠난 지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데도 나는 그토록 사랑을 나누며 살았던 시외할머니와 쇠꼬챙이 할아버지 내외가 지금도 너무나 보고 싶어, 글을 쓰며 손수건 하나가 다 젖도록 울만큼 그분들을 사랑했다. 그분들이 부디 하느님 대전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길 기도드리며….
그토록 사랑했던 할머니를 보내야 하는 쓰라린 아픔
시외갓댁에 도착해, 한달음에 할머니가 계신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싸늘해지신 할머니를 보자 힘이 털썩 풀리며 할머니를 붙들고 오열하며 울고 말았다. 더는 대답이 없으신 할머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할머니... 조금만 더 계시지, 우리 꼭 다시 함께 살기로 했잖아요.
이렇게 먼저 가시면 저는 어떡해요.” 하며 통곡을 하는데, 옆에 계신 시어머니도 눈물을 훔치시며 “이제 그만 울어라.” 하셨다. 할머니께서는 96세에 돌아가셨기에 다들 호상이라고 했다. 그랬기에 우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나만은 너무나 슬퍼 눈물을 멈출 줄 몰랐다. 나를 떠나기 싫어 그리도 나의 손을 놓지 못하고 슬프게 우시던 사랑하는 내 할머니!
그토록 나를 붙들고 우시던 시외할머니의 따뜻했던 손은 이제는 차갑게 온기를 잃은 채 힘없이 떨어지며 더는 나를 붙들지도 못하셨다. “할머니, 저 어떡하면 좋아요? 이제 할머니 없이 저야말로 어찌 살아요. 기다리시기로 저와 약속했는데 이리 먼저 먼 길을 가시면 어떡해요. 흐흐흑...” 주체할 수 없이 울고 있는 내게 할머니와의 추억이 새록새록 찾아와 더 눈물이 났다.
나는 그동안 여기서도, 저기서도, 그토록 홀대당하시는 시외할머니를 생각할 때면 너무 가엽고 또 보고 싶어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짠했다. 시외할머니와 광주 시댁에서 함께 살기 전, 나주 손주며느리 집에 계실 때부터 늘 시어머니 돈 대드리며 돈이 없는 와중에도 내가 먹지 않고 아껴가며 조금씩 돈을 모아 나는 한 번씩 할머니 잡수실 술과 안주를 사서 찾아뵈었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너무 기뻐하시며 소중하게 간직해오신 쌈짓돈을 치마를 걷고 허리춤에서 꺼내어 내게 가만히 쥐여 주시곤 했다. 처음에는 절대로 받지 않으려고 뿌리쳤으나 할머니가 우시는 바람에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거절치 않고 받아서 그에 더 보태어 항상 무엇이든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술과 안주를 사다 드리곤 했었다.
할머니가 나와 더 가까워지자, 조용히 “아가, 혹시 너 술 좋아하냐?”하고 물으셨다. 그래서 “네? 할머니, 저는 술을 전혀 못 해요. 막걸리만 걸러도 술 취해서 쓰러져요. 몇 번이나 쓰러졌는걸요.” 했더니 깜짝 놀라시며 말씀하셨다. “우메 시상에. 너는 혼자 컸는디 어쩌면 그렇게 어른 공경할 줄도 안다냐? 술을 좋아 안 하면 술 권할 줄도 모르는 것인디.”
하시며 글썽이시며 “내가 술을 좋아하는데 술 먹고 싶다고 해도 손주며느리가 안 사다 주더라. 그런디 술도 안 좋아하는 네가 어찌 알고 사다 준다냐?” 하시며 우셨다. 연세 드신 할머니가 시장에 가시기도 어려우시니 한두 번씩 간혹 부탁하시는데도, 손주며느리는 들은 척도 안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냉대만 당하시던 시외할머니는 내가 할머니한테 갈 때마다 너무 기뻐 고마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사실, 시외할머니의 딸인 시어머니는 항상 내게 “혼자 옹호받고 커서 저런다.”며 자주 구박을 하셨지만, 시외할머니는 전혀 딸과는 다르게 “아가, 너는 홀어머니 밑에 혼자 커도 양친 멀쩡히 살아있는 식구 많은 집 자슥보다 어찌 그리도 훨씬 더 잘한다냐.” 하셨다.
시외할머니는 정말 천사 같고 아기같이 너무나 예쁜 할머니였다. 나는 원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예뻐하고 사랑하기도 했지만, 내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해 잘 해드렸기에 어르신들 중에는 나와 나쁘신 분들이 한 분도 없었다. 쇠꼬챙이 할아버지와도 그렇게 깊은 사랑의 정을 나누며 행복하게 지내지 않았는가!
결국 내가 사랑으로 잘하면 그 사랑이 메아리로 되돌아온다고 생각한다. 외롭고 고독한 시외할머니셨지만 내가 모시고 살 때 할머니도 행복하시고, 나는 몸은 힘들어도 사랑을 나누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계실 때, “아가, 네 덕에 나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야.”
하며 그렇게 아이같이 해맑게 웃으시며 기뻐하시니, 나도 덩달아 너무너무 기쁘게 사랑을 나누며 살았다. 그러나 이제 할머니는 가셨으니, 나는 내가 숨 쉬고 살아있는 동안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안집 할아버지 부부를 돌아가신 시외할머니인 셈 치고, 또 부모님인 셈 치고 존경과 사랑으로 최선을 다해 마음 써드리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우리 큰아들이 6~7살 때 시외할머니를 모셨으니 이 글을 쓰는 지금, 시외할머니께서 이 세상을 떠난 지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데도 나는 그토록 사랑을 나누며 살았던 시외할머니와 쇠꼬챙이 할아버지 내외가 지금도 너무나 보고 싶어, 글을 쓰며 손수건 하나가 다 젖도록 울만큼 그분들을 사랑했다. 그분들이 부디 하느님 대전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길 기도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