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의료사고를 내 탓과 셈치고로 봉헌
죽어가던 셋째 아이를 살리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 온 신경을 다 쏟는 동안 나는 그나마 있는 체력마저 다 소진되고 말았다. 그러나 건강한 엄마가 건강한 아이를 데리고 꽃길을 산책하면서 행복해한 셈 치고 봉헌하니 그래도 해낼 수 있었다. 셋째 아이가 살아나자 나는 너무나 기뻐, 더더욱 온 힘을 다해 모든 일들을 사랑받으면서 건강한 셈 치고 했다.
그러나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나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그 당시 나는 계속해서 몸이 더욱 안 좋아져 온몸은 만신창이었고, 걸어 다닐 힘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도 필사적인 사랑의 힘을 발휘하여 건강한 셈 치고 온갖 집안일을 다하며 네 아이를 건사했으니 내 상태가 어떠했겠는가!
그전에도 죽을힘을 다해 버텨왔지만, 넷째를 낳고 나서부터 겪어온 일들만 나열해도 내가 이토록 아프게 된 것이 이상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추운 겨울, 넷째를 낳은 지 17일 만에 시어머니께 쌀을 사드리기 위해 8시간 이상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하혈까지 하며 80kg나 되는 쌀을 사서 버스에 실어 드린 일,
물에 떠내려가는 아이를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차디찬 거센 폭포에 몸을 날려 뛰어든 일, 급성 맹장염으로 전대병원에 입원해서 검사와 수술, 퇴원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죽음과도 같았던 시간들…. 그뿐이었는가! 거즈가 배에서 터져 나온 후 5개월 보름 이상 여러 병원에 다니며 치료해도 낫지 않고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고름이 나왔던 일 등등….
결국 상처가 악화되어 수술했던 전대병원에 어렵게 다시 가니 진단 결과는 장 유착이었다. 3개월 이상이나 그 긴 거즈가 배 속에서 썩어가며 장기들을 압박하고 있었으니 어찌 장이 온전할 수 있겠으며, 어찌 유착이 안 될 수가 있었겠는가! 그것은 분명히 큰 의료사고였고, 명백한 병원의 과실이었다.
그렇지만 그 병원에서 수술한 내 탓으로 받아들이며 항의하거나 고소하지 않고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했다. 장 유착은 수술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돈도 없고, 네 아이들을 두고 수술할 수가 없어서, 꼭 나을 수 있도록 치료해주시라고 울며 의사에게 애원하였었다. 나는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간신히 외적인 상처는 아물었다.
그러나 배의 상처가 아물고 난 후에도 육신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열심히 관리하면 언젠가는 나을 것이라 믿으며,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면서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몸은 더더욱 안 좋아졌다. 눈은 바늘로 쑤시듯이 아파 잘 보이지도 않았고, 도끼로 머리를 빠개는 듯한 두통이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온몸은 날이 갈수록 점점 차가워져 갔다. 그리고 가슴은 진정되지 않을 정도로 계속 두근거리고, 한 번씩 심장을 송곳으로 찔러대고 칼로 가르는듯한 고통이 계속 반복되어 힘들고 등짝까지 너무 아파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주 “으윽-!”하고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오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게다가 속에서 음식이 전혀 받지를 않아 아무것도 못 먹으면서도 항상 속이 너무나 메스꺼워 토하려고만 했다. 그래도 살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입에 넣고 삼키려고 하면 바로 구토가 나오고, 목이 너무나 아파 소량의 물도 삼키기 힘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목 안은 항상 퉁퉁 부은 데다 좁쌀처럼 무언가가 잔뜩 돋아나 가만히 있어도 쑥쑥 아려오는 그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러한 극심한 고통들은 계속해서 악화되어 갔다. 결국은 항문에 뭔가가 크게 튀어나와 앉기도 힘들었는데 대변마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장약을 사다가 관장을 하려고 했으나 그것도 잘 들어가지 않았고 엄청나게 아프기만 했다. 초반엔 조금 관장이 되는가 싶더니 시간이 좀 지나자 이제 항문이 열리지를 않아 아예 관장기가 들어가지를 않았다.
그런 데다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탈수기로 짜내듯이 너무 아파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면서도 아무도 없을 땐 혼자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매 순간순간 숨 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너무 힘이 들어 말 그대로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영양제 주사 한 대라도 맞아보려고 해도 혈관이 다 터져버렸다.
심지어는 신생아들이 맞는 머리 혈관에까지 맞아보았지만 역시나 터져버려서 링거도 맞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또 발에 물집 같은 것들이 계속 생겨 ‘무좀인가?’ 하고 무좀약을 발라봐도 심해졌다. 군서 동네병원에 가서 항문과 발을 치료해봐도 호전되기는커녕 더욱더 악화만 되었다.
그래서 한의원까지 들러 약을 지어 발랐으나 효과는커녕 오히려 계속 부풀어 올라 심해져 갔다. 그리고 급기야 항문과 발이 점점 더 퉁퉁 부어 걸을 수조차 없이 너무 심했다. 견딜 수 없이 힘들어 눈물이 줄줄 나는데도 이렇게 말로 나열하기도 힘든 극심한 모든 고통을 사랑받은 셈 치며 최선을 다해 봉헌했다.
그렇게 힘들어도 아내로서, 네 아이의 엄마로서 해나가야 하는 수많은 일들은 엄연한 현실이자 도리였다. 이대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으니,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나의 병이 꼭 나아야 했다. 하지만 멀리 있는 다른 병원에 가려고 해도 함께 갈 사람이 없었다. 친정어머니 혼자 넷째 아이를 업고, 걸을 수 없는 나를 부축하여 데리고 병원에 갈 수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살고자 몸부림하는 내 의지와는 달리, 극심해져 가는 고통은 사방에서 나를 압박해왔다. 나는 하느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 부디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어 힘을 주소서! 그리하여 제게 맡겨주신 가족을 끝까지 잘 돌보게 해주소서.”
분명한 의료사고를 내 탓과 셈치고로 봉헌
죽어가던 셋째 아이를 살리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 온 신경을 다 쏟는 동안 나는 그나마 있는 체력마저 다 소진되고 말았다. 그러나 건강한 엄마가 건강한 아이를 데리고 꽃길을 산책하면서 행복해한 셈 치고 봉헌하니 그래도 해낼 수 있었다. 셋째 아이가 살아나자 나는 너무나 기뻐, 더더욱 온 힘을 다해 모든 일들을 사랑받으면서 건강한 셈 치고 했다.
그러나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나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그 당시 나는 계속해서 몸이 더욱 안 좋아져 온몸은 만신창이었고, 걸어 다닐 힘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도 필사적인 사랑의 힘을 발휘하여 건강한 셈 치고 온갖 집안일을 다하며 네 아이를 건사했으니 내 상태가 어떠했겠는가!
그전에도 죽을힘을 다해 버텨왔지만, 넷째를 낳고 나서부터 겪어온 일들만 나열해도 내가 이토록 아프게 된 것이 이상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추운 겨울, 넷째를 낳은 지 17일 만에 시어머니께 쌀을 사드리기 위해 8시간 이상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하혈까지 하며 80kg나 되는 쌀을 사서 버스에 실어 드린 일,
물에 떠내려가는 아이를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차디찬 거센 폭포에 몸을 날려 뛰어든 일, 급성 맹장염으로 전대병원에 입원해서 검사와 수술, 퇴원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죽음과도 같았던 시간들…. 그뿐이었는가! 거즈가 배에서 터져 나온 후 5개월 보름 이상 여러 병원에 다니며 치료해도 낫지 않고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고름이 나왔던 일 등등….
결국 상처가 악화되어 수술했던 전대병원에 어렵게 다시 가니 진단 결과는 장 유착이었다. 3개월 이상이나 그 긴 거즈가 배 속에서 썩어가며 장기들을 압박하고 있었으니 어찌 장이 온전할 수 있겠으며, 어찌 유착이 안 될 수가 있었겠는가! 그것은 분명히 큰 의료사고였고, 명백한 병원의 과실이었다.
그렇지만 그 병원에서 수술한 내 탓으로 받아들이며 항의하거나 고소하지 않고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했다. 장 유착은 수술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돈도 없고, 네 아이들을 두고 수술할 수가 없어서, 꼭 나을 수 있도록 치료해주시라고 울며 의사에게 애원하였었다. 나는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간신히 외적인 상처는 아물었다.
그러나 배의 상처가 아물고 난 후에도 육신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열심히 관리하면 언젠가는 나을 것이라 믿으며,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면서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몸은 더더욱 안 좋아졌다. 눈은 바늘로 쑤시듯이 아파 잘 보이지도 않았고, 도끼로 머리를 빠개는 듯한 두통이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온몸은 날이 갈수록 점점 차가워져 갔다. 그리고 가슴은 진정되지 않을 정도로 계속 두근거리고, 한 번씩 심장을 송곳으로 찔러대고 칼로 가르는듯한 고통이 계속 반복되어 힘들고 등짝까지 너무 아파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주 “으윽-!”하고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오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게다가 속에서 음식이 전혀 받지를 않아 아무것도 못 먹으면서도 항상 속이 너무나 메스꺼워 토하려고만 했다. 그래도 살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입에 넣고 삼키려고 하면 바로 구토가 나오고, 목이 너무나 아파 소량의 물도 삼키기 힘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목 안은 항상 퉁퉁 부은 데다 좁쌀처럼 무언가가 잔뜩 돋아나 가만히 있어도 쑥쑥 아려오는 그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러한 극심한 고통들은 계속해서 악화되어 갔다. 결국은 항문에 뭔가가 크게 튀어나와 앉기도 힘들었는데 대변마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장약을 사다가 관장을 하려고 했으나 그것도 잘 들어가지 않았고 엄청나게 아프기만 했다. 초반엔 조금 관장이 되는가 싶더니 시간이 좀 지나자 이제 항문이 열리지를 않아 아예 관장기가 들어가지를 않았다.
그런 데다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탈수기로 짜내듯이 너무 아파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면서도 아무도 없을 땐 혼자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매 순간순간 숨 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너무 힘이 들어 말 그대로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영양제 주사 한 대라도 맞아보려고 해도 혈관이 다 터져버렸다.
심지어는 신생아들이 맞는 머리 혈관에까지 맞아보았지만 역시나 터져버려서 링거도 맞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또 발에 물집 같은 것들이 계속 생겨 ‘무좀인가?’ 하고 무좀약을 발라봐도 심해졌다. 군서 동네병원에 가서 항문과 발을 치료해봐도 호전되기는커녕 더욱더 악화만 되었다.
그래서 한의원까지 들러 약을 지어 발랐으나 효과는커녕 오히려 계속 부풀어 올라 심해져 갔다. 그리고 급기야 항문과 발이 점점 더 퉁퉁 부어 걸을 수조차 없이 너무 심했다. 견딜 수 없이 힘들어 눈물이 줄줄 나는데도 이렇게 말로 나열하기도 힘든 극심한 모든 고통을 사랑받은 셈 치며 최선을 다해 봉헌했다.
그렇게 힘들어도 아내로서, 네 아이의 엄마로서 해나가야 하는 수많은 일들은 엄연한 현실이자 도리였다. 이대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으니,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나의 병이 꼭 나아야 했다. 하지만 멀리 있는 다른 병원에 가려고 해도 함께 갈 사람이 없었다. 친정어머니 혼자 넷째 아이를 업고, 걸을 수 없는 나를 부축하여 데리고 병원에 갈 수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살고자 몸부림하는 내 의지와는 달리, 극심해져 가는 고통은 사방에서 나를 압박해왔다. 나는 하느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 부디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어 힘을 주소서! 그리하여 제게 맡겨주신 가족을 끝까지 잘 돌보게 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