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시동생의 졸업식에 갔더니
여섯째 시동생이 대학교를 졸업한다고 하여 졸업식에 참석하였다. 병든 나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여러 번 차를 갈아타고 광주까지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은 큰 무리였다. 그러나 다섯째 시동생을 서울로 학교 보내느라 여섯째 시동생에게는 더 많이 신경 써주지 못한 것이 언제나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그러기에 힘들어도 가족과 함께 여행가는 셈 치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갔다. 여섯째 시동생만을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대학 등록금을 내어준다던가, 그것이 어려울 땐 학자금 융자를 받아 이자와 원금을 시어머니께 전해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이 시동생은 매 학기마다 전액 장학금도 받았고, 반액 장학금을 받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매번 등록금 전액을 다 받아가셨다. 여섯째 시동생은 없는 형편에 어렵게 학교를 다녔다. 당시 집에 대학생이 세 사람이나 있었기도 했지만, 시동생들 등록금이나 용돈은 다 시어머니가 다 받아가셔서 관리하셨으니, 우리는 직접 용돈도 제대로 주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졸업식이 끝나고 시동생은 미소를 지으며 “형수님! 그동안 저 때문에 고생하셨습니다. 형수님이 이 학사모를 쓰셔야 해요.” 하면서 기어이 나에게 학사복을 입히고 학사모까지 씌우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시동생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지만 “아녜요, 삼촌,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이 학사모는 어머님이 쓰셔야죠. 저는 학사모를 쓴 셈 칠게요.” 하고 손을 저으며 극구 사양했다. 그래도 시동생은, “형수님! 형수님 아니었으면 우리가 공부는커녕 살아가기도 힘들었을 텐데요. 이 모든 것 형수님 덕분으로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고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었으니 꼭 형수님이 쓰셔야 합니다.” 했다.
그리고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기어이 내게 학사복과 학사모를 입혀주고 씌워주었다. 정작 내가 병들어 죽어가면서도 판사가 되기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다 해준 다섯째 시동생은 단 한 번도 고맙다거나 수고했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되려 더 많이 관심 가져주지 못해 항상 미안했던 여섯째 시동생이 이렇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 주다니!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알아준 시동생의 마음에 큰 보람을 느껴 더욱 잘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사랑이 불타올랐다. “하느님, 부디 여섯째 시동생의 앞길을 환히 밝혀 주소서.”하고 기도했다.
훗날,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여섯째 시동생 가족들이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인도해주셨다. 나의 미약한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셨음에 나는 무한한 감사를 드렸다.
여섯째 시동생의 졸업식에 갔더니
여섯째 시동생이 대학교를 졸업한다고 하여 졸업식에 참석하였다. 병든 나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여러 번 차를 갈아타고 광주까지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은 큰 무리였다. 그러나 다섯째 시동생을 서울로 학교 보내느라 여섯째 시동생에게는 더 많이 신경 써주지 못한 것이 언제나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그러기에 힘들어도 가족과 함께 여행가는 셈 치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갔다. 여섯째 시동생만을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대학 등록금을 내어준다던가, 그것이 어려울 땐 학자금 융자를 받아 이자와 원금을 시어머니께 전해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이 시동생은 매 학기마다 전액 장학금도 받았고, 반액 장학금을 받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매번 등록금 전액을 다 받아가셨다. 여섯째 시동생은 없는 형편에 어렵게 학교를 다녔다. 당시 집에 대학생이 세 사람이나 있었기도 했지만, 시동생들 등록금이나 용돈은 다 시어머니가 다 받아가셔서 관리하셨으니, 우리는 직접 용돈도 제대로 주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졸업식이 끝나고 시동생은 미소를 지으며 “형수님! 그동안 저 때문에 고생하셨습니다. 형수님이 이 학사모를 쓰셔야 해요.” 하면서 기어이 나에게 학사복을 입히고 학사모까지 씌우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시동생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지만 “아녜요, 삼촌,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이 학사모는 어머님이 쓰셔야죠. 저는 학사모를 쓴 셈 칠게요.” 하고 손을 저으며 극구 사양했다. 그래도 시동생은, “형수님! 형수님 아니었으면 우리가 공부는커녕 살아가기도 힘들었을 텐데요. 이 모든 것 형수님 덕분으로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고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었으니 꼭 형수님이 쓰셔야 합니다.” 했다.
그리고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기어이 내게 학사복과 학사모를 입혀주고 씌워주었다. 정작 내가 병들어 죽어가면서도 판사가 되기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다 해준 다섯째 시동생은 단 한 번도 고맙다거나 수고했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되려 더 많이 관심 가져주지 못해 항상 미안했던 여섯째 시동생이 이렇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 주다니!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알아준 시동생의 마음에 큰 보람을 느껴 더욱 잘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사랑이 불타올랐다. “하느님, 부디 여섯째 시동생의 앞길을 환히 밝혀 주소서.”하고 기도했다.
훗날,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여섯째 시동생 가족들이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인도해주셨다. 나의 미약한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셨음에 나는 무한한 감사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