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자 비로소 아내의 부재를 체험해 본 남편은 나의 손을 꼬옥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여보,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 그래. 없는 집에 시집와서 고생만 하고 시가집 돌보랴, 남편 돌보랴, 시동생들 돌보랴, 다섯째 동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큰아이를 업고 열심히 일하다가 당신이 이 모양이 되었으니...
여보, 모두가 내 탓이야. 여보, 이제 잘할게. 잘살아 보도록 힘을 다하여 내가 노력할게, 응? 여보.”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한 아내의 얼굴을 만지며 남편은 굵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끝없이 용서를 청했다. 남편의 따뜻한 진심 어린 말에 그동안 나의 모든 아픔이 눈 녹듯 사라지고 희망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임신 중에도 엄마가 워낙 못 먹었기에 아이들이 태어날 때는 작았다. 그러나 엄마가 그렇게 못 먹었지만, 큰딸과 큰아들 모두 엄마의 젖만 먹고도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둘째인 큰아들은 젖으로 키운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벌써 8.4kg이 넘어 간호사들이 “어떻게 키웠기에 애가 이렇게 크대요?” 하고 놀랐다.
그리고 돌이 되자 아이를 보는 모든 이들이 우량아 선발 대회에 내보내라고 했고, 두 돌이 지난 뒤에는 20kg이 넘었으니 너무 커서 징그럽다고 할 정도였다. 아이를 돌봐줄 곳도 마땅치 않았기에 할 수 없이 그 큰 아이를 업고 내려놓지 못한 채 힘겹게 업고 일하다가 이번의 일을 당한 것이니 남편 마음이 더욱 아팠을 것이다.
남편과 어머니의 강한 만류로, 내 아이를 강제 낙태시킨 산부인과 병원에 한마디의 항의조차 하지 못했고 결국 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만 3년이 지난 뒤에 광주 그 산부인과 근처에 갈 일이 있었다. 궁금하여 그 산부인과를 찾아가 보았더니 이미 그곳에 있던 그 산부인과는 없어졌다.
알고 보니 그 산부인과 원장은 그 뒤로도 계속 그렇게 돈을 벌기 위해 부정한 방법으로 낙태를 강행하다가, 결국 그 만행이 들통나 문을 닫고 미국으로 도망갔다고 했다. 다시 떠오르는 그날, 강제로 아이를 잃은 기억에 숨이 막혀 압도될 것만 같았다. 가슴을 에는 아픔이 밀려왔다.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 어떤 것도 빠짐없이 순명해 왔다.
그렇지만 그 사건만큼은 남편과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내 소신대로 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랬다면 더 큰 죄악을 막았을 것이며 많은 아이를 구하고, 산모들의 건강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느님을 모를 때부터 이제까지 내게 강하게 드는 생각이나 나도 모르게 나오는 말, 그것은 단순히 나의 생각이나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해주시는 것이었다.
순명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무고한 어린 생명들의 희생을 본의 아니게 방관하게 된 것 같아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나는 하느님을 알고 산 피정에서 회개하고 난 후, 그 병원장과 직원들이 내가 있었기에 죄를 짓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너무 불쌍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랑받은 셈치고 봉헌했더니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원장과 직원들을 온전히 용서하고 그들의 회개와 죄없이 죽임당한 태아들의 영혼을 위하여 미사를 봉헌해 주었다. 그렇게 봉헌하고 나니 내 마음에 돌멩이처럼 얹혀있던 것들이 완전히 사라져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들에게 사랑받은 셈치고 봉헌했더니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미안해졌다.”
wlsgodqn님 은총의 주님께서 예비하신 삶 묵상 프로젝트 글 올려주심에 너무나도 감사드려요~
wlsgodqn님과 그 가정에 축복이 가득하시고 항상 영육간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월 첫토 기도회에 꼭 뵈어요~
나주 순례 꾸준히 다니시고 앞으로도 모든 일 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거짓 공지문과 PD수첩과 TV 조선의 탐사보도 세븐거짓 방송등으로 마리아의 구원방주에서
내리는 일 없이 예수님과 성모님을 따라서 5대 영성으로 무장하여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어서 빨리 나주성모님 인준과 극심한 고통을 봉헌하시는 율리아 엄마의 빠른 회복과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율리아 엄마를 33세 로 만들어 주시어 세계 각처에서
메시지와 5대 영성 전파로 모든이가 마리아의 구원방주에 승선하도록 해주소서~
천국에서 계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나주성모님 인준을 위하여 전구해 주소서~
주여 영광과 찬미를 영원히 받으소서~ 성모님 기쁨만 가득하소서~ 아멘! 알렐루야~ ♡♡♡
어린 생명들의 희생을 본의 아니게 방관하게 된 것
같아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나는 하느님을
알고 산 피정에서 회개하고 난 후, 그 병원장과
직원들이 내가 있었기에 죄를 짓게 되었다고 생각
하니 그들이 너무 불쌍했다.그래서 그들에게 사랑받은
셈치고 봉헌했더니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미안해졌다
아멘!!!아멘!!!아멘!!! 감사합니다 !!!
“여보, 미안해!”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자 비로소 아내의 부재를 체험해 본 남편은 나의 손을 꼬옥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여보,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 그래. 없는 집에 시집와서 고생만 하고 시가집 돌보랴, 남편 돌보랴, 시동생들 돌보랴, 다섯째 동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큰아이를 업고 열심히 일하다가 당신이 이 모양이 되었으니...
여보, 모두가 내 탓이야. 여보, 이제 잘할게. 잘살아 보도록 힘을 다하여 내가 노력할게, 응? 여보.”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한 아내의 얼굴을 만지며 남편은 굵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끝없이 용서를 청했다. 남편의 따뜻한 진심 어린 말에 그동안 나의 모든 아픔이 눈 녹듯 사라지고 희망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임신 중에도 엄마가 워낙 못 먹었기에 아이들이 태어날 때는 작았다. 그러나 엄마가 그렇게 못 먹었지만, 큰딸과 큰아들 모두 엄마의 젖만 먹고도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둘째인 큰아들은 젖으로 키운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벌써 8.4kg이 넘어 간호사들이 “어떻게 키웠기에 애가 이렇게 크대요?” 하고 놀랐다.
그리고 돌이 되자 아이를 보는 모든 이들이 우량아 선발 대회에 내보내라고 했고, 두 돌이 지난 뒤에는 20kg이 넘었으니 너무 커서 징그럽다고 할 정도였다. 아이를 돌봐줄 곳도 마땅치 않았기에 할 수 없이 그 큰 아이를 업고 내려놓지 못한 채 힘겹게 업고 일하다가 이번의 일을 당한 것이니 남편 마음이 더욱 아팠을 것이다.
남편과 어머니의 강한 만류로, 내 아이를 강제 낙태시킨 산부인과 병원에 한마디의 항의조차 하지 못했고 결국 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만 3년이 지난 뒤에 광주 그 산부인과 근처에 갈 일이 있었다. 궁금하여 그 산부인과를 찾아가 보았더니 이미 그곳에 있던 그 산부인과는 없어졌다.
알고 보니 그 산부인과 원장은 그 뒤로도 계속 그렇게 돈을 벌기 위해 부정한 방법으로 낙태를 강행하다가, 결국 그 만행이 들통나 문을 닫고 미국으로 도망갔다고 했다. 다시 떠오르는 그날, 강제로 아이를 잃은 기억에 숨이 막혀 압도될 것만 같았다. 가슴을 에는 아픔이 밀려왔다.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 어떤 것도 빠짐없이 순명해 왔다.
그렇지만 그 사건만큼은 남편과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내 소신대로 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랬다면 더 큰 죄악을 막았을 것이며 많은 아이를 구하고, 산모들의 건강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느님을 모를 때부터 이제까지 내게 강하게 드는 생각이나 나도 모르게 나오는 말, 그것은 단순히 나의 생각이나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해주시는 것이었다.
순명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무고한 어린 생명들의 희생을 본의 아니게 방관하게 된 것 같아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나는 하느님을 알고 산 피정에서 회개하고 난 후, 그 병원장과 직원들이 내가 있었기에 죄를 짓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너무 불쌍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랑받은 셈치고 봉헌했더니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원장과 직원들을 온전히 용서하고 그들의 회개와 죄없이 죽임당한 태아들의 영혼을 위하여 미사를 봉헌해 주었다. 그렇게 봉헌하고 나니 내 마음에 돌멩이처럼 얹혀있던 것들이 완전히 사라져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