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도 시어머님은 몇 번에 걸쳐 나에게 돈을 부탁하셨다. 아는 사람이 없던 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이모님께 부탁하여 많은 빚을 내어 전해드렸다. 땅을 팔면 돈을 갚아 주시겠다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드디어 땅이 팔렸다. 가중되는 빚으로 심적인 부담도 커져만 가고 있었던 터라,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오, 이제 한시름 놓겠구나.’ 하고 좋아했다.
그런데 땅을 팔면 빚을 갚아 주겠다고 하신 시어머님은 전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우리에게 넘어온 빚은 그렇다고 해도 이모님께서 겨울까지 꼭 갚아야 한다고 하신 돈에 대해서도 전혀 갚을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차마 시어머니께 말씀은 드리지 못하고 언제 갚아 주시려나 하고 애만 태우는데, 3개월이 지나도 말씀이 없으셨다.
시어머니가 파신 그 땅은 3개월이 지나자, 땅값이 무려 10배로 뛰어올랐다. 이미 거래가 된 후였지만 아는 사람에게 땅을 팔았기에 약간의 보상까지 더 받을 수 있으셨다. 그러나 여전히 이모님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을 생각은 없어 보이셨다. 그렇지 않아도 이모님들은 두 분 다 맏며느리이셨기에 내가 8남매 장손과 결혼한다고 할 때 결혼을 반대하셨던 분들이었다.
“사람만 좋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란다.”라고 걱정하시며 처음에는 반대하시다가 남편을 만나보시더니 사람은 좋다고 하셨다. 그래도 형제가 많은 집 장손이기에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이모님들은 그이와의 결혼을 만류하셨었다. 그런데 결국 그 우려를 현실로 돌려드리게 되니 이모님께 너무 죄송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모님도 큰 며느리로 시집가서 숱한 마음 고통을 당하시고 많은 질병까지 앓고 계셨다. 그런데 나까지 고통을 더 가중시켜 드렸으니 이렇게 미안하고 송구스러울 데가 어디 있겠는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고 살아왔던 나는 더는 이모님께 고통을 드릴 수가 없었다.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아쉬운 소리도 전혀 못 했던 나였지만 심호흡을 하며 다른 곳에서 돈을 빌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용기를 내어 알음알음으로 여러 곳에서 빚을 얻어 시어머님께서 이모님에게 지신 빚을 내가 대신 갚아드렸다. 그러다 보니 내가 매달 갚아야만 하는 이자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면 절대로 못 했겠지만, 그것은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그리고 며느리로서 시어머니께 효도하며, 또 그이의 아내로서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안타깝게도 돈이 없어 미용실을 매수할 수가 없으니 아픈 몸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먼 동네까지도 다 다니면서 어렵게 사사로 머리를 해야 했다.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아이를 업고, 쉬는 시간도 없이 일해야 했고 시어머니 빚을 더 갚아나가기 위해 부업으로 골동품 자개 일까지 쉴 사이 없이 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치지 않는 하혈과 심해져 가는 통증으로 신음하며 온종일 일을 했던 것이다.
편히 쉬는 셈치고 봉헌하며 했지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무리만 했던 내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고통으로 무거워지는 머리를 깊이 숙이고 온종일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자개 일하며, 아이들 돌보며, 살림하며 어렵사리 그렇게 돈을 벌어서 눈물겹게 이자와 빚을 조금씩 조금씩 갚아나갔다.
편히 쉬는 셈치고 봉헌하며 일을 했지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무리만 하고 있는 내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고통으로 무거워지는 머리를 깊이
숙이고 온종일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자개 일하며,
아이들 돌보며, 살림하며 어렵사리 그렇게 돈을
벌어서 눈물겹게 이자와 빚을 조금씩 조금씩 갚아
나갔다 아멘!!!아멘!!!아멘!!! 감사합니다 !!!
그 뒤로도 시어머님은 몇 번에 걸쳐 돈을 부탁하셨다. 아는 사람이 없던 나는 하는 수없이 다시 이모님께 부탁하여
많은 빚을 내어 전해드렸다. 땅을 팔면 돈을 갚아 주시겠다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드디어
땅이 팔렸다. ‘오, 이제 한시름 놓겠구나.’ 하고 나는 좋아했다. 그런데 땅을 팔면 갚아주겠다 하신 시어머님은
전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우리에게 넘어온 빚은 그렇다해도 이모님께서 겨울까지 꼭 갚아야 한다고 하신 돈에
대해서도 갚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차마 시어머니께 말씀은 드리지 못하고 언제 갚아주시려나 하는데
3개월이 지나도 말씀이 없으셨다. 시어머니가 파신 그 땅은 3개월이 지나자, 땅값이 무려 10배로 뛰어올랐다.
이미 거래가 된 후였지만 아는 사람에게 땅을 팔았기에 약간의 보상까지 더 받을 수 있으셨다.
그러나 여전히 이모님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을 생각은 없어 보이셨다.
그렇지 않아도 이모님들은 두 분 다 맏며느리여서 내가 8남매 장손과 결혼한다고 할 때 결혼을 반대하셨다.
“사람만 좋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란다.”라고 걱정하시며 처음에는 반대하셨지만 남편을 만나보시더니
사람은 좋다고 하셨다. 그래도 형제가 많은 집 장손이기에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이모님들은 결혼을
반대하셨었다. 그런데 결국 그 우려를 현실로 돌려드리게 되니 이모님께 너무 죄송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땅은 팔렸지만
그 뒤로도 시어머님은 몇 번에 걸쳐 나에게 돈을 부탁하셨다. 아는 사람이 없던 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이모님께 부탁하여 많은 빚을 내어 전해드렸다. 땅을 팔면 돈을 갚아 주시겠다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드디어 땅이 팔렸다. 가중되는 빚으로 심적인 부담도 커져만 가고 있었던 터라,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오, 이제 한시름 놓겠구나.’ 하고 좋아했다.
그런데 땅을 팔면 빚을 갚아 주겠다고 하신 시어머님은 전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우리에게 넘어온 빚은 그렇다고 해도 이모님께서 겨울까지 꼭 갚아야 한다고 하신 돈에 대해서도 전혀 갚을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차마 시어머니께 말씀은 드리지 못하고 언제 갚아 주시려나 하고 애만 태우는데, 3개월이 지나도 말씀이 없으셨다.
시어머니가 파신 그 땅은 3개월이 지나자, 땅값이 무려 10배로 뛰어올랐다. 이미 거래가 된 후였지만 아는 사람에게 땅을 팔았기에 약간의 보상까지 더 받을 수 있으셨다. 그러나 여전히 이모님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을 생각은 없어 보이셨다. 그렇지 않아도 이모님들은 두 분 다 맏며느리이셨기에 내가 8남매 장손과 결혼한다고 할 때 결혼을 반대하셨던 분들이었다.
“사람만 좋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란다.”라고 걱정하시며 처음에는 반대하시다가 남편을 만나보시더니 사람은 좋다고 하셨다. 그래도 형제가 많은 집 장손이기에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이모님들은 그이와의 결혼을 만류하셨었다. 그런데 결국 그 우려를 현실로 돌려드리게 되니 이모님께 너무 죄송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모님도 큰 며느리로 시집가서 숱한 마음 고통을 당하시고 많은 질병까지 앓고 계셨다. 그런데 나까지 고통을 더 가중시켜 드렸으니 이렇게 미안하고 송구스러울 데가 어디 있겠는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고 살아왔던 나는 더는 이모님께 고통을 드릴 수가 없었다.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아쉬운 소리도 전혀 못 했던 나였지만 심호흡을 하며 다른 곳에서 돈을 빌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용기를 내어 알음알음으로 여러 곳에서 빚을 얻어 시어머님께서 이모님에게 지신 빚을 내가 대신 갚아드렸다. 그러다 보니 내가 매달 갚아야만 하는 이자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면 절대로 못 했겠지만, 그것은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그리고 며느리로서 시어머니께 효도하며, 또 그이의 아내로서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안타깝게도 돈이 없어 미용실을 매수할 수가 없으니 아픈 몸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먼 동네까지도 다 다니면서 어렵게 사사로 머리를 해야 했다.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아이를 업고, 쉬는 시간도 없이 일해야 했고 시어머니 빚을 더 갚아나가기 위해 부업으로 골동품 자개 일까지 쉴 사이 없이 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치지 않는 하혈과 심해져 가는 통증으로 신음하며 온종일 일을 했던 것이다.
편히 쉬는 셈치고 봉헌하며 했지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무리만 했던 내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고통으로 무거워지는 머리를 깊이 숙이고 온종일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자개 일하며, 아이들 돌보며, 살림하며 어렵사리 그렇게 돈을 벌어서 눈물겹게 이자와 빚을 조금씩 조금씩 갚아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