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프로젝트💗「주님께서 예비하신 삶」- 555화. 내 도장을 찍어주었더니

wlsgodqn
2023-10-06
조회수 1072

 


 내 도장을 찍어주었더니 


1980년, 미용실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리와 이웃에 살며 피어리스 화장품 대리점을 하고 있던 작은외숙의 둘째 아들인 길영이가 찾아왔다. 길영이는 얼마 전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나와 동갑인 점영이의 남동생으로, 작은외숙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그는 내가 죽으려고 청산가리를 구할 때 사다 주었고, 또 갓난아이일 때부터 내가 너무 예뻐하여 직접 업어 키웠던 동생이기도 하다. 길영이가 다급하게 “누나, 나 지금 50만 원만 좀 빌려줘.” 하여 “얘야, 나도 빚 얻어서 미용실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 많은 돈이 있겠느냐?”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럼 누나, 누나가 돈 빌린 신협 전무님한테 돈 50만 원만 더 빌려 달라고 해봐, 응? 나 지금 굉장히 급해서 그래. 내일 꼭 갚을게.”라고 했다. 나는 내일 돈을 갚는다는 말에 내가 돈 없어 힘들었던 때를 생각하며 “그래? 그럼 전무님께 한 번 가보자.” 하고 신협에 가서 전무님께 말씀드렸다.


“전무님! 내일 갚을 테니 돈 50만 원만 빌릴 수 있을까요?” 했다. 전무님은 아주 쉽게 “그렇게 하세요. 그 대신 도장을 가지고 오실래요?” 하셨다. 길영이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조금 후에 동생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누나, 누나 도장이라야 한대.” 하여 선뜻 내 도장을 내주었다.

 



돈을 받은 동생은 고맙다고 하더니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런데 그 이튿날, 빌린 돈을 바로 갚겠다고 약속했던 동생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아무리 전화를 하고 대리점에 찾아가도 소식이 없더니, 오후 늦게야 전화로 “누나, 미안해 내일은 꼭 갚을게.”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때까지 평생 약속을 어겨본 적이 없었기에, 신협 전무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집 저집을 다니면서 “내일 갚을게요.” 하면서 돈을 빌렸다. 어려웠던 그 당시 갑자기 50만 원이란 큰돈을 빌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미용실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는 집도 별로 없었다.



남의 이야기를 하며 헐뜯는 모습들이 너무 싫어서 평소에 누구를 잘 사귀지도 않았기에 돈을 빌리기가 더 어려웠다. 수많은 집을 들러 5만 원, 3만 원, 5천 원 등등 그렇게 조금씩 겨우겨우 빌려 신협에 50만 원을 갚았다.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겨본 적이 없는 나는, 길영이의 지키지 않고 반복되는 “내일은 꼭 갚을게.” 하는 말을 매번 그대로 믿었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빌려준 돈을 갚기 위해 미용실에서 손님을 받아야 할 내가 손님도 받지 못한 채, 계속 매일 돈을 빌리러 다녔다. 그러다가 너무 신경을 썼는지 신장까지 나빠져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 바로 돈을 갚을 줄 알았던 동생은 계속 매일 ‘내일 갚겠다.’는 똑같은 소리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러기를 무려 한 달 정도 다 되었을 때, 그 동생은 갑자기 사색이 되어 미용실에 뛰어 들어왔다. 길영이는 절박한 목소리로 “누나, 누나! 큰일 났어. 지금 50만 원이 없으면 피어리스 대리점이 넘어가게 돼. 그러니 누나 달러 이자라도 돈 좀 빌려다 줘, 그럼 내일 한꺼번에 100만 원 다 갚을게.”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그 동생이 빌린 돈 갚아 내느라고 미용실 손님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매일 사정하다시피 여러 군데 돈 빌리러 다니면서 그렇게도 힘들었다. 하지만 큰일 났다며 사색이 되어 달려온 그 애를 보자 너무 안쓰러워 나의 힘든 처지는 금세 잊었다. 나는 달러 돈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손님 중에 사채를 하는 사람에게 달러 이자로 돈 50만 원을 또 빌려다 주었다. 이제까지 내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나와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쌀 한 번 빌려달라고 부탁해본 적이 없고, 아이들을 굶기기까지 하면서도 아쉬운 소리 한 번 못 해 본 내가 아니던가!

 

 

그런데 외사촌 동생 때문에 이집 저집을 다니면서 돈 빌리던 생각을 하면 어떻게 해낸 것인지 지금도 아찔하다. ‘차라리 내일, 내일 하지 말고, 어려우니 한동안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으면 적금을 넣어 대출이라도 받았을 텐데….’ 그러나 결국 그 후로 길영이의 소식은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고 행방이 묘연했다.


대리점에 찾아가 보니 대리점도 문을 닫은 것이 아닌가! 길영이가 빌려 간 100만 원은 고스란히 내가 다 갚아야 했다. 그 많은 돈을 다 갚기까지는 너무나 긴 날들이었다. 그동안 시어머님 때문에도 여기저기 돈 빌리러 다닌 날이 허다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힘든 일이었다.


 


나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나에게 와서 돈을 빌려 달라고 할까?’ 하고 생각하니 불쌍하고 안쓰럽게만 생각되어 내가 부끄럽고 힘든 것들은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니 극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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