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에 나가다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생활 속에 내 몸은 약해져만 갔다. 사랑받은 셈치고 끝없는 시련을 넘고 또 넘어왔지만, 몸이 아파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으니 마음마저 약해지는 듯했다. 도저히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남편에게 말해 1974년, 우리 부부는 누구의 권유도 없이 성당에 나갔다.
이제까지 개신교회에는 가봤지만, 성당에는 가본 적도 없었고 성당이 어떤 곳인지 들은 적도 없었다. 그래도 교회를 다니려면 천주교회가 좋겠다고 생각이 되어 남편과 타협해서 성당에 나가기로 했다. 당시 나주 본당 신부님은 조철현 비오 신부님, 원장 수녀님은 황 아나다시아 수녀님이셨다.
나의 결혼생활은 너무나 힘들고 고단하였고, 가난 속에 시어머님께 계속 돈 대드리느라 몸도 고통스러웠지만, 성당에 다니는 것은 너무나 즐거웠다. 교회에 나가는 것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편했다. 성당에만 가면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느님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그 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행복할 수 있었다. 하느님 생각이 한시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하느님이 너무 그리워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미사 참례를 했다. 교리 받는 일, 미사 다니는 일은 나의 유일한 행복이었다. 아주 적은 돈이지만 부푼 맘으로 토요일 특전 미사와, 주일 미사에 헌금하였다.
그러고 나면, 내 마음은 환희로 차오르곤 했다. 세상에 그보다 더 기쁜 것이 있을까? 없는 돈이지만 반찬값에서 떼고 머리도 미용실 가서 한 셈치며 스스로 손질하면서 조금씩 모아 헌금했다. 그렇게 절약한 돈을 헌금하면서 나는 너무 기쁘게 성당엘 다녔다.
고난 중에 위로받을 길 없던 내 막막했던 가슴에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홍수가 되어 채워주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마귀는 주위 사람들을 이용하여 그런 나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작은 외갓집은 남묘호랑개교에 심취해 있었고, 시할머니는 “13대 종손 며느리가 무슨 교회를 다니느냐?” 하셨다.
또 시골 할머니는 집에 오실 때마다 “네가 기어이 성당을 다닌다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라도 못 다니게 하실 것이다.”라고 하시기까지 했다. 그래서 다니지 말라는 성당을 다니면서 한편으로는 순명하지 못한 것 같아 괴롭기도 했지만, 그러나 나는 하느님이 너무 좋아 기쁘게 성당엘 다녔다.
신부님께서 가정 방문이라도 하실 때면 너무 기뻐 아무리 바쁘고 아파도 그 긴 골목길까지 깨끗이 쓸어놓곤 했다. 그 정도로 나에겐 너무나 소중하고 기쁜 일이었기에 예수님을 맞는 그런 마음으로 맞이하곤 했다. 원장 수녀님께서는 나와 우리 아이들을 너무 예뻐해 주셨다.
우리가 가난하게 사는 줄도 모르시는 수녀님이 수녀원에 있는 감나무에서 땡감이라도 떨어지면 주워다 주시고, 호박잎과 애호박도 따다 주시곤 하셨다. 그런 원장 수녀님이 성모님처럼 느껴졌고, 어머니의 사랑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미사가 없는 월요일 하루 성당에 못 나가는 날이면 예수님과 원장 수녀님이 너무 보고 싶어 다음날을 무척 기다리곤 하였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온갖 사랑과 정성을 다해 베풀어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던 나!
심지어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로부터도 따듯한 사랑의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나 늘 사랑받은 셈치고 봉헌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던 내가 성당에서 신부님과 수녀님께서 너무 자상하게 잘해주시니 부모님의 정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나를 이런 방법으로 부르셨다.
성당에 나가다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생활 속에 내 몸은 약해져만 갔다. 사랑받은 셈치고 끝없는 시련을 넘고 또 넘어왔지만, 몸이 아파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으니 마음마저 약해지는 듯했다. 도저히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남편에게 말해 1974년, 우리 부부는 누구의 권유도 없이 성당에 나갔다.
이제까지 개신교회에는 가봤지만, 성당에는 가본 적도 없었고 성당이 어떤 곳인지 들은 적도 없었다. 그래도 교회를 다니려면 천주교회가 좋겠다고 생각이 되어 남편과 타협해서 성당에 나가기로 했다. 당시 나주 본당 신부님은 조철현 비오 신부님, 원장 수녀님은 황 아나다시아 수녀님이셨다.
나의 결혼생활은 너무나 힘들고 고단하였고, 가난 속에 시어머님께 계속 돈 대드리느라 몸도 고통스러웠지만, 성당에 다니는 것은 너무나 즐거웠다. 교회에 나가는 것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편했다. 성당에만 가면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느님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그 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행복할 수 있었다. 하느님 생각이 한시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하느님이 너무 그리워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미사 참례를 했다. 교리 받는 일, 미사 다니는 일은 나의 유일한 행복이었다. 아주 적은 돈이지만 부푼 맘으로 토요일 특전 미사와, 주일 미사에 헌금하였다.
그러고 나면, 내 마음은 환희로 차오르곤 했다. 세상에 그보다 더 기쁜 것이 있을까? 없는 돈이지만 반찬값에서 떼고 머리도 미용실 가서 한 셈치며 스스로 손질하면서 조금씩 모아 헌금했다. 그렇게 절약한 돈을 헌금하면서 나는 너무 기쁘게 성당엘 다녔다.
고난 중에 위로받을 길 없던 내 막막했던 가슴에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홍수가 되어 채워주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마귀는 주위 사람들을 이용하여 그런 나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작은 외갓집은 남묘호랑개교에 심취해 있었고, 시할머니는 “13대 종손 며느리가 무슨 교회를 다니느냐?” 하셨다.
또 시골 할머니는 집에 오실 때마다 “네가 기어이 성당을 다닌다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라도 못 다니게 하실 것이다.”라고 하시기까지 했다. 그래서 다니지 말라는 성당을 다니면서 한편으로는 순명하지 못한 것 같아 괴롭기도 했지만, 그러나 나는 하느님이 너무 좋아 기쁘게 성당엘 다녔다.
신부님께서 가정 방문이라도 하실 때면 너무 기뻐 아무리 바쁘고 아파도 그 긴 골목길까지 깨끗이 쓸어놓곤 했다. 그 정도로 나에겐 너무나 소중하고 기쁜 일이었기에 예수님을 맞는 그런 마음으로 맞이하곤 했다. 원장 수녀님께서는 나와 우리 아이들을 너무 예뻐해 주셨다.
우리가 가난하게 사는 줄도 모르시는 수녀님이 수녀원에 있는 감나무에서 땡감이라도 떨어지면 주워다 주시고, 호박잎과 애호박도 따다 주시곤 하셨다. 그런 원장 수녀님이 성모님처럼 느껴졌고, 어머니의 사랑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미사가 없는 월요일 하루 성당에 못 나가는 날이면 예수님과 원장 수녀님이 너무 보고 싶어 다음날을 무척 기다리곤 하였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온갖 사랑과 정성을 다해 베풀어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던 나!
심지어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로부터도 따듯한 사랑의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나 늘 사랑받은 셈치고 봉헌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던 내가 성당에서 신부님과 수녀님께서 너무 자상하게 잘해주시니 부모님의 정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나를 이런 방법으로 부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