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3. 친정어머니를 크게 다치게 하신 일만은 봉헌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너무너무 기쁘게 살고 있었기에, 세상 어떤 것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친정어머니가 다치신 일만큼은 시어머니로부터 사랑받은 셈치려고 해도 얼른 아름답게 봉헌이 잘 되지 않았다. “밥 먹여 주고, 옷 입혀주고, 가르쳤냐?”
시어머님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게 계속 들려오면서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행여라도 ‘아비 없는 자식’, ‘홀엄씨(홀어머니) 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하며 살아왔던가!
외롭게 자랐기에 시부모님이 계시고 형제간도 많은 집에 시집가서 오순도순 서로 우애하며 행복하게 잘 살아 보고픈 마음으로 내가 택한 길이었다. 사랑으로 나를 다 바쳐 가정의 화목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어떤 어려움에도 사랑받은 셈치고 봉헌하며 시댁에 헌신했다.
장손이라지만 시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빚밖에 없었다. 오히려 장남이니 아무것도 줄 수 없다며 시집갈 때 친정어머니가 큰 빚을 내어 해주신 혼수품까지(자개장롱, 자개장식장, 찬장, 이불, 베개, 농지기 등등 모든 것) 시어머니께서 모두 사용하셨다.
그래서 우리 살림날 때도 단 하나도 돌려주지 않으셨다. 친정어머니는 이유도 묻지 않고 또다시 빚내어 살림을 전부 새로 해주시니 너무너무 죄송했다. 그마저 시어머님 사랑받은 셈치며 시집온 날부터 내 한 몸 생각하지 않고 쉴 사이 없이 일했다. 결혼식을 치르자마자 유일한 생계 수단인 잘 되던 미용실까지 급급매로 처분해서 시어머니가 재촉하시던 빚을 갚아드리지 않았는가!
그로 인해 만삭의 몸으로 갖은 고생 다 하며 허리끈 졸라매고, 냉수만 마시며 굶어가면서도, 시어머니가 자주 돈 달라고 찾아오실 때마다 사사로 미용을 하여 돈을 마련해 드렸다. 어떤 일이든 시어머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시댁 식구들 옷 해주고, 먹여주고, 뒷바라지하면서 약혼, 결혼 패물까지 다 팔면서도 단 하나 아까워하지 않고 사랑으로 기쁘게 했다.
반면에 정작 우리 아이들은 먹고 싶은 것 못 먹이고, 옷 한 벌 제대로 사주지 못했다. 항상 싱싱한 것 먹인 셈치며 상처 나고 흠집 난 싼 과일만을 사 먹이고, 좋은 옷 입힌 셈치며 헌 스웨터 풀어서 손뜨개로 옷을 짜 입히며 살았다. 그러다 시아버님이 손주들 보고 싶어 하신다며 시어머니가 광주 시댁에 들어와 살라고 하셨다.
가면 돈을 전혀 벌 수 없으니 가는 것이 힘들었지만 순명하여 시댁에서 살며, 잠시도 쉬지 못하고 시부모님의 온갖 구박 속에 열여섯 식구 대가족을 돌보면서 살림하다 셋째 아이까지 유산되었다. 병원도 못 가보고 계속 출혈하다 그 이후 내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어 결국 나는 말기암에 걸려 죽어갔다.
그런 중에도 시어머니 돈 대드리고, 시어머니의 친정어머니를 96세까지 내가 사랑으로 업어주고 똥 치워가며 정말 사랑으로 돌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시동생 셋을 대학 보냈다. 시아버지는 서울 경성대(지금의 서울대) 나오셔서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 대학원까지 나오셨고 시어머니도 인텔리셨다.
그러나 자녀들은 대학도 안 보내셨다. 큰아들이 광주에서 가장 좋은 서중, 일고에서 그렇게 공부를 잘했지만 대학을 보내지 않았고 둘째는 중학교까지, 셋째, 넷째는 초등학교까지만 보내셨다. 그래서 다섯째는 내가 죽어가면서도 대학원까지 다 보내고, 다섯째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서도 나는 계속 시댁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다 암이 온몸에 다 번져 사형선고까지 받았을 때, 친정어머니 가슴에 무덤이 되는 것이 너무나 죄송하여 나는 눈물의 나날들을 보내지 않았던가! 소처럼 쉬지 않고 일하며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그 수많은 일들을 치렀건만...
시어머님은 어떤 큰돈이 들어가도 내가 다 내도록 하시면서 항상 “내가 없으면 다 저그들이 할 일인데 뭐….” 하고 말씀하시며 아주 당연시하셨다. 반면에 작은 자식들이 한 일들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하며 나에게 자랑하셨다.
내가 모든 일들을 다 하면서도 언제나 시어머니가 “아가 고맙구나.” 말해주시며 다독이면서 늘 사랑해주신 셈치고 봉헌했다. 내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기쁘게 해왔기에 조금도 섭섭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내가 시댁을 위해 헌신하는 동안, 친정어머니만이 유일한 조력자이셨다.
불쌍한 어머니는 하나 있는 딸자식 시집 보내며 “너 시집가서 나는 아무것도 안 해줘도 된다. 내가 한 번씩 가면 홍어만 사주면 된다.” 하셨다. 그러나 효도로써 잘 모시기는커녕 시댁 돕느라 단 한 번도 홍어 한 번 못 사드렸다
친정어머니는 고생하는 딸이 안쓰러워 시댁을 돕고자 남의 논과 밭까지 소작 얻어서 피땀 흘려 농사지어 가져다주고, 아픈 딸 위해 자주 집에 오셔서 도와주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죽음에서 살려주시자마자, 시어머니가 돈 달라고 찾아오셨기에 그 돈 대드리기 위해 나는 없는 돈 빚내서 미용실을 차렸다.
그 후에도 시어머니 빚쟁이들은 미용실에까지 찾아와 돈을 가져갔으며 시부모님의 모든 빚보증과 빚까지 갚아온 나였다. 그러니 친정어머니는 바쁜 나를 도와 네 명의 손주들 돌봐 주시고, 살림하기 위해 집에 와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친정어머니를 우리가 모시고 산다며 한 번씩 비꼬아서 말씀하시면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내 어머니는 오히려 시집간 지 한참 된 딸과 사위, 손주들 뒤치다꺼리하느라 평생 고생만 하셨다. 친정어머니까지 딸의 시댁을 위해서 희생하시게 해서 항상 마음 아팠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그것을 친정어머니 모신다며 좋지 않게 보신 것이다. 게다가 시어머니께서 자신의 회갑 치르기 위해 고생하신 친정어머니를 밀쳐 크게 다치게 하셨으니… 나에게는 그 어떤 모욕이나 몰매, 심지어는 나를 짓밟고 죽인다 해도 사랑받은 셈치고 감사하며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딸을 위해 딸의 시댁까지 온갖 고생만 하시는 늙으신 어머니를 다치게 한 일 만큼은 아픈 가슴으로 남아 쉽사리 봉헌이 되지 않았다.
643. 친정어머니를 크게 다치게 하신 일만은 봉헌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너무너무 기쁘게 살고 있었기에, 세상 어떤 것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친정어머니가 다치신 일만큼은 시어머니로부터 사랑받은 셈치려고 해도 얼른 아름답게 봉헌이 잘 되지 않았다. “밥 먹여 주고, 옷 입혀주고, 가르쳤냐?”
시어머님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게 계속 들려오면서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행여라도 ‘아비 없는 자식’, ‘홀엄씨(홀어머니) 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하며 살아왔던가!
외롭게 자랐기에 시부모님이 계시고 형제간도 많은 집에 시집가서 오순도순 서로 우애하며 행복하게 잘 살아 보고픈 마음으로 내가 택한 길이었다. 사랑으로 나를 다 바쳐 가정의 화목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어떤 어려움에도 사랑받은 셈치고 봉헌하며 시댁에 헌신했다.
장손이라지만 시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빚밖에 없었다. 오히려 장남이니 아무것도 줄 수 없다며 시집갈 때 친정어머니가 큰 빚을 내어 해주신 혼수품까지(자개장롱, 자개장식장, 찬장, 이불, 베개, 농지기 등등 모든 것) 시어머니께서 모두 사용하셨다.
그래서 우리 살림날 때도 단 하나도 돌려주지 않으셨다. 친정어머니는 이유도 묻지 않고 또다시 빚내어 살림을 전부 새로 해주시니 너무너무 죄송했다. 그마저 시어머님 사랑받은 셈치며 시집온 날부터 내 한 몸 생각하지 않고 쉴 사이 없이 일했다. 결혼식을 치르자마자 유일한 생계 수단인 잘 되던 미용실까지 급급매로 처분해서 시어머니가 재촉하시던 빚을 갚아드리지 않았는가!
그로 인해 만삭의 몸으로 갖은 고생 다 하며 허리끈 졸라매고, 냉수만 마시며 굶어가면서도, 시어머니가 자주 돈 달라고 찾아오실 때마다 사사로 미용을 하여 돈을 마련해 드렸다. 어떤 일이든 시어머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시댁 식구들 옷 해주고, 먹여주고, 뒷바라지하면서 약혼, 결혼 패물까지 다 팔면서도 단 하나 아까워하지 않고 사랑으로 기쁘게 했다.
반면에 정작 우리 아이들은 먹고 싶은 것 못 먹이고, 옷 한 벌 제대로 사주지 못했다. 항상 싱싱한 것 먹인 셈치며 상처 나고 흠집 난 싼 과일만을 사 먹이고, 좋은 옷 입힌 셈치며 헌 스웨터 풀어서 손뜨개로 옷을 짜 입히며 살았다. 그러다 시아버님이 손주들 보고 싶어 하신다며 시어머니가 광주 시댁에 들어와 살라고 하셨다.
가면 돈을 전혀 벌 수 없으니 가는 것이 힘들었지만 순명하여 시댁에서 살며, 잠시도 쉬지 못하고 시부모님의 온갖 구박 속에 열여섯 식구 대가족을 돌보면서 살림하다 셋째 아이까지 유산되었다. 병원도 못 가보고 계속 출혈하다 그 이후 내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어 결국 나는 말기암에 걸려 죽어갔다.
그런 중에도 시어머니 돈 대드리고, 시어머니의 친정어머니를 96세까지 내가 사랑으로 업어주고 똥 치워가며 정말 사랑으로 돌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시동생 셋을 대학 보냈다. 시아버지는 서울 경성대(지금의 서울대) 나오셔서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 대학원까지 나오셨고 시어머니도 인텔리셨다.
그러나 자녀들은 대학도 안 보내셨다. 큰아들이 광주에서 가장 좋은 서중, 일고에서 그렇게 공부를 잘했지만 대학을 보내지 않았고 둘째는 중학교까지, 셋째, 넷째는 초등학교까지만 보내셨다. 그래서 다섯째는 내가 죽어가면서도 대학원까지 다 보내고, 다섯째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서도 나는 계속 시댁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다 암이 온몸에 다 번져 사형선고까지 받았을 때, 친정어머니 가슴에 무덤이 되는 것이 너무나 죄송하여 나는 눈물의 나날들을 보내지 않았던가! 소처럼 쉬지 않고 일하며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그 수많은 일들을 치렀건만...
시어머님은 어떤 큰돈이 들어가도 내가 다 내도록 하시면서 항상 “내가 없으면 다 저그들이 할 일인데 뭐….” 하고 말씀하시며 아주 당연시하셨다. 반면에 작은 자식들이 한 일들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하며 나에게 자랑하셨다.
내가 모든 일들을 다 하면서도 언제나 시어머니가 “아가 고맙구나.” 말해주시며 다독이면서 늘 사랑해주신 셈치고 봉헌했다. 내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기쁘게 해왔기에 조금도 섭섭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내가 시댁을 위해 헌신하는 동안, 친정어머니만이 유일한 조력자이셨다.
불쌍한 어머니는 하나 있는 딸자식 시집 보내며 “너 시집가서 나는 아무것도 안 해줘도 된다. 내가 한 번씩 가면 홍어만 사주면 된다.” 하셨다. 그러나 효도로써 잘 모시기는커녕 시댁 돕느라 단 한 번도 홍어 한 번 못 사드렸다
친정어머니는 고생하는 딸이 안쓰러워 시댁을 돕고자 남의 논과 밭까지 소작 얻어서 피땀 흘려 농사지어 가져다주고, 아픈 딸 위해 자주 집에 오셔서 도와주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죽음에서 살려주시자마자, 시어머니가 돈 달라고 찾아오셨기에 그 돈 대드리기 위해 나는 없는 돈 빚내서 미용실을 차렸다.
그 후에도 시어머니 빚쟁이들은 미용실에까지 찾아와 돈을 가져갔으며 시부모님의 모든 빚보증과 빚까지 갚아온 나였다. 그러니 친정어머니는 바쁜 나를 도와 네 명의 손주들 돌봐 주시고, 살림하기 위해 집에 와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친정어머니를 우리가 모시고 산다며 한 번씩 비꼬아서 말씀하시면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내 어머니는 오히려 시집간 지 한참 된 딸과 사위, 손주들 뒤치다꺼리하느라 평생 고생만 하셨다. 친정어머니까지 딸의 시댁을 위해서 희생하시게 해서 항상 마음 아팠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그것을 친정어머니 모신다며 좋지 않게 보신 것이다. 게다가 시어머니께서 자신의 회갑 치르기 위해 고생하신 친정어머니를 밀쳐 크게 다치게 하셨으니… 나에게는 그 어떤 모욕이나 몰매, 심지어는 나를 짓밟고 죽인다 해도 사랑받은 셈치고 감사하며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딸을 위해 딸의 시댁까지 온갖 고생만 하시는 늙으신 어머니를 다치게 한 일 만큼은 아픈 가슴으로 남아 쉽사리 봉헌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