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9. 오진이라 해도, 고통이 필요해 허락하심이니 주님께 영광 드리자
주님과 성모님께서 부족한 나의 고통을 통해 많은 영혼들을 구하시고자 이 희생을 허락하심을 믿으며, 수술하러 가게 되었다. 부산에서 구급차까지 보내주어 나는 아주 편하게 부산까지 가서 입원하게 되었다.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칠까 봐 고통 중에도 내색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과 모두 포옹하고 인사 나누었다.
내가 여행 가는 사람같이 밝게 웃으며 떠나니 옆에서 핀잔들을 주기도 했다. 남편은 “여보, 기도할게. 잘 다녀와.” 했고, 슬퍼하시던 어머니도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시며 “율리아야! 여기는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라이.” 하셨다. “네, 잘 다녀올게요! 어머니, 부디 건강하게 잘 계시고 제가 없는 자리 잘 부탁드려요.”
나는 부산으로 떠나기 전 눈물 흘리신 성모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드렸다. “오, 사랑하올 나의 어머니시여! 봉사자들이 다 떠난 상황에, 저마저 수술하러 부산에 가서 성모님 집을 비우게 되어 너무나 죄송합니다. 그러나 부족한 이 죄녀의 모든 고통을 통해서 주님께는 영광이 되고 성모님께 위로가 되고 저희 모두는 감사가 마르지 않게 하소서.
간절히 기도하오며 봉헌하오니, 부디 제가 없어도 성모님 집을 찾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저의 고통을 통하여 영혼 육신에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소서. 아멘!”
나는 부산 메리놀 병원에 입원했다. 산부인과 담당 과장님이 진료 중에 “아픈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하고 물으셨다. 낙태 보속고통이 더욱 극심해져 너무너무 심하게 아팠던 것은 전년도 10월부터였다. 그런데 엉겁결에 “두 달 정도 되었어요.” 하고 대답이 나왔다.
그런데 과장님은 기가 찬다는 듯 “예? 두 달 되었다구요? 허이구, 이런 상태로 어떻게 두 달을 견뎌요?” 하였다. 내가 고통을 봉헌하는 것을 모르는 과장님은 내 말을 절대 믿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랑받은 셈치고 봉헌했다. 결국 ‘급성 골반 내 염증’으로 진단이 내려졌다.
과장님은 “급성이니까 일단 10일 동안 금식하고 주사와 약으로 집중치료해 봅시다.” 하셨다. 예상외의 진단이었다. 여수의 산부인과 최고권위자 선생님은 장이 자궁과 유착되었다고 했는데 그때와는 진단이 다르게 나오니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렸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대학병원이니 제대로 잘 봤겠지. 이 질병은 고통으로 인해 온 것이니 수술하지 말고 어떻게든 약으로 해보자. 이 사순절에, 메리놀 과장님이 제대로 진단했다면 그것은 주님께 영광일 것이고, 혹여라도 오진이라면 고통이 필요하기에 주님께서 나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아름답게 봉헌하자.
진단이 맞아도 틀려도 주님께 영광입니다.’ 생각하며, 신부님들께 수술이 아니라 치료하기로 한 것을 말씀드리니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죽어도 주님의 것이요. 살아도 주님의 것이오니 오로지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아멘!” 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며, 1979년 전대 병원에서처럼 실수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나는 10일 동안 금식하면서 하루에 항생제 주사를 10번 이상 맞고, 제일 독한 항생제 약을 계속 먹으면서 치료하게 되었다. 내가 입원할 당시, 입원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도록 메리놀 병원장 신부님께 약속을 받았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부터 어떤 두 수녀님이 오셔서 나를 돌본다고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닌가?
두 수녀님은 잠도 자지 않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교대해서라도 한 분은 안 주무시고 꼭 나만 바라보시니 나도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옆에 사람이 있으면 전혀 잠을 자지 못 했기 때문이다. 수강 아파트로 이사 가며 처음 부부가 쓸 방이 생긴 날, 성직자들과 세상 모든이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장부 율리오 씨와 부부 관계를 봉헌한 후부터 그랬다.
게다가 내가 걸을 수 있는데도 수녀님들이 간호한다며 화장실까지 데리고 다니시는 것이었다. 식구들에게도 내 속살을 보이는 것을 싫어했는데, 일면식도 없던 분들이 화장실까지 따라와서 다 보고 계시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사정하고, 제발 좀 나가서 계시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지극정성으로 마음 써주시니 감사해야 하는데 도움받는 것이 익숙지 않아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그분들이 내 말대로 해주신 셈치고, 또 편하게 쉬며 치료한 셈치고 최선을 다해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봉헌했다.
689. 오진이라 해도, 고통이 필요해 허락하심이니 주님께 영광 드리자
주님과 성모님께서 부족한 나의 고통을 통해 많은 영혼들을 구하시고자 이 희생을 허락하심을 믿으며, 수술하러 가게 되었다. 부산에서 구급차까지 보내주어 나는 아주 편하게 부산까지 가서 입원하게 되었다.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칠까 봐 고통 중에도 내색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과 모두 포옹하고 인사 나누었다.
내가 여행 가는 사람같이 밝게 웃으며 떠나니 옆에서 핀잔들을 주기도 했다. 남편은 “여보, 기도할게. 잘 다녀와.” 했고, 슬퍼하시던 어머니도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시며 “율리아야! 여기는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라이.” 하셨다. “네, 잘 다녀올게요! 어머니, 부디 건강하게 잘 계시고 제가 없는 자리 잘 부탁드려요.”
나는 부산으로 떠나기 전 눈물 흘리신 성모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드렸다. “오, 사랑하올 나의 어머니시여! 봉사자들이 다 떠난 상황에, 저마저 수술하러 부산에 가서 성모님 집을 비우게 되어 너무나 죄송합니다. 그러나 부족한 이 죄녀의 모든 고통을 통해서 주님께는 영광이 되고 성모님께 위로가 되고 저희 모두는 감사가 마르지 않게 하소서.
간절히 기도하오며 봉헌하오니, 부디 제가 없어도 성모님 집을 찾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저의 고통을 통하여 영혼 육신에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소서. 아멘!”
나는 부산 메리놀 병원에 입원했다. 산부인과 담당 과장님이 진료 중에 “아픈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하고 물으셨다. 낙태 보속고통이 더욱 극심해져 너무너무 심하게 아팠던 것은 전년도 10월부터였다. 그런데 엉겁결에 “두 달 정도 되었어요.” 하고 대답이 나왔다.
그런데 과장님은 기가 찬다는 듯 “예? 두 달 되었다구요? 허이구, 이런 상태로 어떻게 두 달을 견뎌요?” 하였다. 내가 고통을 봉헌하는 것을 모르는 과장님은 내 말을 절대 믿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랑받은 셈치고 봉헌했다. 결국 ‘급성 골반 내 염증’으로 진단이 내려졌다.
과장님은 “급성이니까 일단 10일 동안 금식하고 주사와 약으로 집중치료해 봅시다.” 하셨다. 예상외의 진단이었다. 여수의 산부인과 최고권위자 선생님은 장이 자궁과 유착되었다고 했는데 그때와는 진단이 다르게 나오니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렸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대학병원이니 제대로 잘 봤겠지. 이 질병은 고통으로 인해 온 것이니 수술하지 말고 어떻게든 약으로 해보자. 이 사순절에, 메리놀 과장님이 제대로 진단했다면 그것은 주님께 영광일 것이고, 혹여라도 오진이라면 고통이 필요하기에 주님께서 나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아름답게 봉헌하자.
진단이 맞아도 틀려도 주님께 영광입니다.’ 생각하며, 신부님들께 수술이 아니라 치료하기로 한 것을 말씀드리니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죽어도 주님의 것이요. 살아도 주님의 것이오니 오로지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아멘!” 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며, 1979년 전대 병원에서처럼 실수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나는 10일 동안 금식하면서 하루에 항생제 주사를 10번 이상 맞고, 제일 독한 항생제 약을 계속 먹으면서 치료하게 되었다. 내가 입원할 당시, 입원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도록 메리놀 병원장 신부님께 약속을 받았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부터 어떤 두 수녀님이 오셔서 나를 돌본다고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닌가?
두 수녀님은 잠도 자지 않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교대해서라도 한 분은 안 주무시고 꼭 나만 바라보시니 나도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옆에 사람이 있으면 전혀 잠을 자지 못 했기 때문이다. 수강 아파트로 이사 가며 처음 부부가 쓸 방이 생긴 날, 성직자들과 세상 모든이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장부 율리오 씨와 부부 관계를 봉헌한 후부터 그랬다.
게다가 내가 걸을 수 있는데도 수녀님들이 간호한다며 화장실까지 데리고 다니시는 것이었다. 식구들에게도 내 속살을 보이는 것을 싫어했는데, 일면식도 없던 분들이 화장실까지 따라와서 다 보고 계시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사정하고, 제발 좀 나가서 계시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지극정성으로 마음 써주시니 감사해야 하는데 도움받는 것이 익숙지 않아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그분들이 내 말대로 해주신 셈치고, 또 편하게 쉬며 치료한 셈치고 최선을 다해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봉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