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수와 모든 것이 똑같다던 말을 믿고 성사시켰더니
다섯째 시동생이 결혼하기 전, 결혼을 하겠다고 하는 아가씨는 사정이 조금 복잡한 듯했다. 서울 사는 아가씨였는데, 고등학교밖에 안 나왔다.(나중에 대학을 다녔다고 함) 우리나라가 급속도로 성장하던 역동의 시기인 6-80년대, 이 당시에는 한 해 한 해가 아주 급격한 차이가 있었다.
고등학교까지 나오면 많이 배운 턱이고 아주 잘 나온 것인 나 때와는 또 달랐다. 나보다 9살 어린 다섯째 시동생이 결혼한다고 한 이 아가씨 또래에서는, 서울 살면 대학을 가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다섯째 시동생이 대학원까지 나와 판사가 되었으니 다들 두 사람의 학벌 차이로 말이 많았다.
그리고 그 아가씨의 친아버지가 이북과 관계가 있어 판사에게는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아가씨의 어머니는 이 딸을 데리고 재혼을 했다. 재혼한 남편이 한의원을 했다 한다. 시어머니는 한약 한 재를 받아 잡수시고는 그때부터 그 아가씨를 며느리 삼기를 원했다. 누군가는 겨우 한약 한 재에 넘어가셨느냐고까지 했다.
그렇게 시어머니만 빼고 집안 어른들을 비롯해 가족이 반대했다. 그런데 평소에는 말도 없던 다섯째 시동생이 내게 결혼을 할 수 있도록 해주라고 사정을 했다. “형수님, 마음씨도 착하고 마음 씀씀이도 그렇고 형수와 모든 것이 다 똑같아요. 형수가 결혼만 성사시켜 주면 우리 꼭 성당도 다닐게요.” 하면서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청했다.
우리 친정어머니께서는 그 누구보다 엄격하게 나를 키우셨음에도 불구하고, 홀어머니의 외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만 했던 숱한 어려움들이 떠올랐다. 그렇기에 사연 많은 그 아가씨가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시동생이 모든 것이 나하고 똑같다고 한 말을 그대로 믿었기에 온 가족을 설득해 결혼을 성사시켰다.
비록 아가씨의 어머니가 재혼을 한 점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왔다면 분명 나와 같은 마음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래, 나도 부족하지만, 나처럼 사랑을 할 수 있고 희생할 수 있다면 내 동서로 받아들여서 나와 함께 우리 집안을 잘 이끌어갈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내가 나서서 결혼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의 도움 한 번 받아보지 않고 내가 죽어가면서 나 홀로 가르쳐 판사를 만들고 결혼까지 시켰는데도, 다섯째 시동생 결혼할 때 우리에게 혼수로 옷을 지어준 것도 아니고, 홍색 한복 한 벌 할 수 있는 겉감만 가져왔다.
내가 한복이나 예단을 원해서가 아니다. 결혼할 때의 기본적인 인사 표시이기에 조금은 놀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빨간색 옷감의 색상이 너무 촌스러워 한복을 해 입기가 난감했다. 지금이야 한복의 디자인이 화려해지고 다양해져서 여러 스타일이 있다.
하지만, 그 당시 한복을 위아래로 홍색으로 지어 입는 경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안감까지 내가 해서 옷을 지어 입는다면 입지도 못할 옷에 쓸데없는 돈이 많이 들 것이니, 아예 옷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다섯째 네가 좋은 옷, 좋은 한복 해준 셈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봉헌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결혼 후 처음으로 형수를 본 것이 이날이었다. 시동생은 원래 그렇게 무심하더라도, 형수와 똑같이 착하고 마음 씀씀이나 모든 것이 똑같다던 동서가 나와는 아예 정반대인듯했다. 꼭 해주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저녁밥은 먹었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나는 언제나 우리 집을 찾아오는 거지들이나 장사꾼들에게 내가 먹을 밥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먹은 셈치고 굶을 때마다 그들의 허기를 채워준 그 기쁨에 얼마나 흐뭇해하며 기쁘게 대접해왔던가. 그것이 나에게는 당연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동생 부부가 살갑게 맞이해 준 셈치고 봉헌하며, 오늘은 저녁 시간이 조금 지났으니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맛있는 저녁밥을 먹은 셈치고 아름답게 봉헌했다.
형수와 모든 것이 똑같다던 말을 믿고 성사시켰더니
다섯째 시동생이 결혼하기 전, 결혼을 하겠다고 하는 아가씨는 사정이 조금 복잡한 듯했다. 서울 사는 아가씨였는데, 고등학교밖에 안 나왔다.(나중에 대학을 다녔다고 함) 우리나라가 급속도로 성장하던 역동의 시기인 6-80년대, 이 당시에는 한 해 한 해가 아주 급격한 차이가 있었다.
고등학교까지 나오면 많이 배운 턱이고 아주 잘 나온 것인 나 때와는 또 달랐다. 나보다 9살 어린 다섯째 시동생이 결혼한다고 한 이 아가씨 또래에서는, 서울 살면 대학을 가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다섯째 시동생이 대학원까지 나와 판사가 되었으니 다들 두 사람의 학벌 차이로 말이 많았다.
그리고 그 아가씨의 친아버지가 이북과 관계가 있어 판사에게는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아가씨의 어머니는 이 딸을 데리고 재혼을 했다. 재혼한 남편이 한의원을 했다 한다. 시어머니는 한약 한 재를 받아 잡수시고는 그때부터 그 아가씨를 며느리 삼기를 원했다. 누군가는 겨우 한약 한 재에 넘어가셨느냐고까지 했다.
그렇게 시어머니만 빼고 집안 어른들을 비롯해 가족이 반대했다. 그런데 평소에는 말도 없던 다섯째 시동생이 내게 결혼을 할 수 있도록 해주라고 사정을 했다. “형수님, 마음씨도 착하고 마음 씀씀이도 그렇고 형수와 모든 것이 다 똑같아요. 형수가 결혼만 성사시켜 주면 우리 꼭 성당도 다닐게요.” 하면서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청했다.
우리 친정어머니께서는 그 누구보다 엄격하게 나를 키우셨음에도 불구하고, 홀어머니의 외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만 했던 숱한 어려움들이 떠올랐다. 그렇기에 사연 많은 그 아가씨가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시동생이 모든 것이 나하고 똑같다고 한 말을 그대로 믿었기에 온 가족을 설득해 결혼을 성사시켰다.
비록 아가씨의 어머니가 재혼을 한 점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왔다면 분명 나와 같은 마음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래, 나도 부족하지만, 나처럼 사랑을 할 수 있고 희생할 수 있다면 내 동서로 받아들여서 나와 함께 우리 집안을 잘 이끌어갈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내가 나서서 결혼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의 도움 한 번 받아보지 않고 내가 죽어가면서 나 홀로 가르쳐 판사를 만들고 결혼까지 시켰는데도, 다섯째 시동생 결혼할 때 우리에게 혼수로 옷을 지어준 것도 아니고, 홍색 한복 한 벌 할 수 있는 겉감만 가져왔다.
내가 한복이나 예단을 원해서가 아니다. 결혼할 때의 기본적인 인사 표시이기에 조금은 놀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빨간색 옷감의 색상이 너무 촌스러워 한복을 해 입기가 난감했다. 지금이야 한복의 디자인이 화려해지고 다양해져서 여러 스타일이 있다.
하지만, 그 당시 한복을 위아래로 홍색으로 지어 입는 경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안감까지 내가 해서 옷을 지어 입는다면 입지도 못할 옷에 쓸데없는 돈이 많이 들 것이니, 아예 옷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다섯째 네가 좋은 옷, 좋은 한복 해준 셈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봉헌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결혼 후 처음으로 형수를 본 것이 이날이었다. 시동생은 원래 그렇게 무심하더라도, 형수와 똑같이 착하고 마음 씀씀이나 모든 것이 똑같다던 동서가 나와는 아예 정반대인듯했다. 꼭 해주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저녁밥은 먹었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나는 언제나 우리 집을 찾아오는 거지들이나 장사꾼들에게 내가 먹을 밥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먹은 셈치고 굶을 때마다 그들의 허기를 채워준 그 기쁨에 얼마나 흐뭇해하며 기쁘게 대접해왔던가. 그것이 나에게는 당연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동생 부부가 살갑게 맞이해 준 셈치고 봉헌하며, 오늘은 저녁 시간이 조금 지났으니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맛있는 저녁밥을 먹은 셈치고 아름답게 봉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