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3월 16일. 그동안 눈물겨운 일들도 많았지만 우리는 어려운 과정을 다 이겨내고 약혼식을 했다. 일등 부부 즉, 잉꼬부부가 되어 한 생을 사랑으로 일치하여 살아갈 것을 깊이 약속하며 광주에 있는 여관 중 가장 크고 좋은 일등 여관에서 양가 가족들과 친지 몇 분이 모인 가운데 조촐한 약혼식을 올렸다.
그 당시 통례로 약혼식 비용은 양가에서 함께 분담했을 때였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빚을 내어 혼자 다 부담하셨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하나뿐인 딸 기죽지 않도록 보란 듯이 해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약혼식장에 우리 친정 식구들이 다 계심에도 불구하고 시아버님은 나를 두고 혀를 끌끌 차셨다.
“내 딸만큼 한 사람은 없구먼.” 눈을 흘기며 하신 말씀에 다들 눈이 동그래져 일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 모습에 우리 외갓집 식구들은 “일본 와세대 대학에 유학까지 다녀오셨다는 분이 왜 저러셔?” “너 시집가면 힘들겠다.” “설사 자기 딸만큼 못하다 할지라도 어떻게 처음 대면한 사돈들 앞에서 그럴 수가 있느냐?”
“배우신 분이라더니 양가 집안이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무슨 실례라냐.” 하시는 등 한마디씩 하며 언짢아하셨다. 훨씬 좋은 조건의 결혼을 성사시켜 주려고 나에게 애걸복걸하시다시피 하신 어르신들도 지켜보고 계신 자리에서 너무 부끄럽고 초라해졌다. 하지만 시아버님께서 사랑으로 좋은 말씀 해주신 셈 치고,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면서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날 시댁에서는 남자분들이 많이 참석하셨다. 그런데 시댁에서는 구두닦이까지 불러 그분들의 구두를 모두 닦게 하더니 친정어머니가 그 돈까지 다 지불하게 하셨다. 없는 형편임에도 하나뿐인 딸의 기가 꺾이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워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그렇지 않으셨나 보다. 그동안 내가 남에게 기죽지 않고,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도 듣지 않게 하려고 나를 엄하게 키우시며 얼마나 애를 쓰셨던가! 그렇게 키운 딸자식이니, 무리해서라도 약혼식만은 남부럽지 않게 해주고 싶으셨던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에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어머니를 편히 모시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애쓰며 살아왔지만, 저의 바람과는 달리 세상이 나를 받아주지 않았기에 어머니를 편히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내 어머니!
인생의 동반자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인생 2막,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 되어서, 부족하지만 여건이 허락하는 한 어머니를 편히 모시도록 노력할게요. 어머니 감사합니다.’
기쁘고 기쁜날 약혼비용을 같이 부담하기는 켜녕
오히려 무시하는 교만의 태도는 이 세상의 욕심과
허영을 그대로 드러내는 아픈 마음입니다..
얼마나 어머니는 속상하셨을까요?
그래도 아들 부럽지 않는 효도를 결심하는 착한심성이
엄마 답습니다....
엄마 힘내세요~~!! 사랑합니다💖💖💖😍🌹
“어머니!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wlsgodqn님 은총의 글 올려주심에 너무나도 감사드려요~
wlsgodqn님과 그 가정에 축복이 가득하시고 항상 영육간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주여 영광과 찬미를 영원히 받으소서~ 성모님 기쁨만 가득하소서~ 아멘! 알렐루야~ ♡♡♡
소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모욕을 다 경험해 보는것 같아요.
그런 자리에 모인 친척들과 어머니앞에서 시아버지의 언행에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게다가 어머니께서는 뒷바라지 다 해주시는데... 저도 어려운 상황에서 더욱
셈 치고 봉헌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멘!
오늘도 무지무지 감사합니다💖
어머니를 편히 모시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애쓰며 살아왔지만, 저의 바람과는 달리 세상이
나를 받아주지 않았기에 어머니를 편히 모시지 못했
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멘!!!아멘!!!아멘!!!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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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식을 올리다
1970년 3월 16일. 그동안 눈물겨운 일들도 많았지만 우리는 어려운 과정을 다 이겨내고 약혼식을 했다. 일등 부부 즉, 잉꼬부부가 되어 한 생을 사랑으로 일치하여 살아갈 것을 깊이 약속하며 광주에 있는 여관 중 가장 크고 좋은 일등 여관에서 양가 가족들과 친지 몇 분이 모인 가운데 조촐한 약혼식을 올렸다.
그 당시 통례로 약혼식 비용은 양가에서 함께 분담했을 때였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빚을 내어 혼자 다 부담하셨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하나뿐인 딸 기죽지 않도록 보란 듯이 해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약혼식장에 우리 친정 식구들이 다 계심에도 불구하고 시아버님은 나를 두고 혀를 끌끌 차셨다.
“내 딸만큼 한 사람은 없구먼.” 눈을 흘기며 하신 말씀에 다들 눈이 동그래져 일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 모습에 우리 외갓집 식구들은 “일본 와세대 대학에 유학까지 다녀오셨다는 분이 왜 저러셔?” “너 시집가면 힘들겠다.” “설사 자기 딸만큼 못하다 할지라도 어떻게 처음 대면한 사돈들 앞에서 그럴 수가 있느냐?”
“배우신 분이라더니 양가 집안이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무슨 실례라냐.” 하시는 등 한마디씩 하며 언짢아하셨다. 훨씬 좋은 조건의 결혼을 성사시켜 주려고 나에게 애걸복걸하시다시피 하신 어르신들도 지켜보고 계신 자리에서 너무 부끄럽고 초라해졌다. 하지만 시아버님께서 사랑으로 좋은 말씀 해주신 셈 치고,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면서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날 시댁에서는 남자분들이 많이 참석하셨다. 그런데 시댁에서는 구두닦이까지 불러 그분들의 구두를 모두 닦게 하더니 친정어머니가 그 돈까지 다 지불하게 하셨다. 없는 형편임에도 하나뿐인 딸의 기가 꺾이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워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그렇지 않으셨나 보다. 그동안 내가 남에게 기죽지 않고,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도 듣지 않게 하려고 나를 엄하게 키우시며 얼마나 애를 쓰셨던가! 그렇게 키운 딸자식이니, 무리해서라도 약혼식만은 남부럽지 않게 해주고 싶으셨던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에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어머니를 편히 모시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애쓰며 살아왔지만, 저의 바람과는 달리 세상이 나를 받아주지 않았기에 어머니를 편히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내 어머니!
인생의 동반자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인생 2막,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 되어서, 부족하지만 여건이 허락하는 한 어머니를 편히 모시도록 노력할게요. 어머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