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합격했으니 아파트 사줘야지?”
시어머님은 시동생이 합격했다는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나주에 내려오셨다. “애미야, 있냐?” 하시는 시어머님의 목소리에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어머님, 축하드려요!” 하고 인사하고 방으로 모시고 들어왔다. 마침 남편도 집에 있었다. 그런데 시어머님은 방에 들어오시자마자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다섯째가 합격했으니 이제 서울에 작은 아파트라도 사줘야지?” “예?” 그간 고생했다는 인사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너무 놀라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아파트를, 그것도 서울에...’ 시어머니는 또 재촉하시며 “왜 대답이 없냐? 너희들, 아파트 어떻게 할래?” 하셨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우리가 서울에 아파트까지 사줘야 한다고요?” 했다. 시어머니는 돈에 대해서는 항상 나에게만 말씀하시다가 처음으로 아들이 있을 때 말씀하셨다. “그래야지야, 고시 합격하면 다 아파트 사준다고 하더라. 그러니 장남인 너희들이 사줘야지.” 그 말씀에 나는 정말 말문이 막혀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죽어가면서도 단 한 번도 먹고 싶은 밥도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고 굶주린 채 먹은 셈 치고 살며 시댁과 시동생들 뒷바라지해왔는데….’ 시어머님은 내가 시집온 뒤 바로, 잘되고 있던 미용실을 급매로 팔아 당신 아들 결혼 빚 갚게 하시더니 여태껏 우리 전세방 얻을 돈까지 또 전세로 방을 얻으면 그 전세방 값도 다 빼가셨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나주에서 독채도 아닌 방 2개짜리 세 들어 살 돈도 없어, 또다시 친정어머니께서 광주 큰 이모님한테 가셔서 어렵게 빌려다 주시지 않았는가! 뿐만 아니라 돈이 없어 아무리 아파 죽어가면서도 병원도 못 갔다.
그래서 결국 목구멍부터 항문까지 다 막혀, 물조차도 넘기지 못하여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암이 온몸에 다 펴져 있었고 시한부가 되어서야 알게 되지 않았는가! 이제껏 다섯째 시동생 가르치느라 죽을 둥 살 둥 버텨오다가 이제는 정말 죽기 직전까지 와버렸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나는, 다섯째 합격 소식을 듣고 ‘이제 되었다!’라며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동안 나를 가장 무겁게 짓누르던 커다란 짐 하나를 덜어 그렇게도 좋아했는데,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이제 또 아파트를 사주라니! 말 그대로 설상가상, 산 넘어 산이었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시어머니께서 결혼 직후부터 이제까지 맨날 나에게 찾아와 돈 가져가신 것을 다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모른다 해도, 다섯째 시동생 학교 보내느라 친정어머니를 포함한 우리 식구 모두가 얼마나 희생해 왔다는 것은 알 텐데, 우리는 꿈도 꿔보지 못한 아파트를 사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남편을 보며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동안 한 번도 어려운 내색을 하지 않던 내가 처음으로 남편에게 눈짓을 했다. 그래도 남편은 방바닥만 보며 가만히 있었다. 우리가 아무 말도 없자 시어머니는 목소리를 더 키워 또 재촉하셨다. “안 들리냐? 아파트 어떡할 거냐고? 엉?” 그래서 할 수 없이 남편을 가만히 찔렀더니 남편은 생전 처음으로 시어머니께 조용히 말씀드렸다.
“어머니, 동생은 이제 걱정 안 하셔도 알아서 잘할 거예요.” 시어머니는 대번에 안색이 어두워지시며 “느그들, 그것 하나 못 해준다고 그러냐? 징허다 그냥!” 하고 역정을 내시며 벌떡 일어나셨다. 놀란 내가 “어머니!”하고 붙잡았더니 확 뿌리쳐서 쇠약한 나는 땅바닥에 철퍼덕 쓰러지고 말았다. 말기 암으로 굳어가는 온몸에 강한 충격이 가해지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시어머니는 내가 사정없이 쓰러져 일어설 수도 없는데도 “너그들 다 필요 없어야!” 하시고는 휭하니 가버리셨다. 시어머니께서 화를 내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시어머니의 무리한 부탁을 처음으로 들어드리지 못한 오늘, 화나서 떠나가시는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저리도록 더 아파왔다.
남편은 시어머니가 가신 후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이의 침묵이 유난히 더 무겁게만 느껴졌다. ‘이제까지 죽을 둥 살 둥 그렇게 최선을 다해 시어머니의 청을 다 들어드렸는데...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생각하니 금방이라도 심장이 멎을 것같이 가슴이 시리고 저며왔다.
아픈 가슴을 애써 쓸어내렸지만, 병들어 아파서 시동생 아파트도 사주지 못하는 내 탓으로 시어머니가 화가 나서 가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시어머니로부터 사랑받은 셈 치고 그 상황을 시어머니의 변화를 위해 봉헌했다.
나는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해주시지 않은 것이 슬픈 것은 아니었다. 그런 말은 이미 들은 셈 치고, 그 무수한 냉대는 이미 사랑받은 셈 치며 다 봉헌했다. 아마 내가 죽음을 목전에 두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서글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어머니가 떠나시고 남편은 말없이 방을 나갔다. 깊은 정적 중에 나는 끝 모를 슬픔으로 여러 생각에 잠겼다.
“다섯째 합격했으니 아파트 사줘야지?”
시어머님은 시동생이 합격했다는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나주에 내려오셨다. “애미야, 있냐?” 하시는 시어머님의 목소리에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어머님, 축하드려요!” 하고 인사하고 방으로 모시고 들어왔다. 마침 남편도 집에 있었다. 그런데 시어머님은 방에 들어오시자마자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다섯째가 합격했으니 이제 서울에 작은 아파트라도 사줘야지?” “예?” 그간 고생했다는 인사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너무 놀라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아파트를, 그것도 서울에...’ 시어머니는 또 재촉하시며 “왜 대답이 없냐? 너희들, 아파트 어떻게 할래?” 하셨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우리가 서울에 아파트까지 사줘야 한다고요?” 했다. 시어머니는 돈에 대해서는 항상 나에게만 말씀하시다가 처음으로 아들이 있을 때 말씀하셨다. “그래야지야, 고시 합격하면 다 아파트 사준다고 하더라. 그러니 장남인 너희들이 사줘야지.” 그 말씀에 나는 정말 말문이 막혀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죽어가면서도 단 한 번도 먹고 싶은 밥도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고 굶주린 채 먹은 셈 치고 살며 시댁과 시동생들 뒷바라지해왔는데….’ 시어머님은 내가 시집온 뒤 바로, 잘되고 있던 미용실을 급매로 팔아 당신 아들 결혼 빚 갚게 하시더니 여태껏 우리 전세방 얻을 돈까지 또 전세로 방을 얻으면 그 전세방 값도 다 빼가셨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나주에서 독채도 아닌 방 2개짜리 세 들어 살 돈도 없어, 또다시 친정어머니께서 광주 큰 이모님한테 가셔서 어렵게 빌려다 주시지 않았는가! 뿐만 아니라 돈이 없어 아무리 아파 죽어가면서도 병원도 못 갔다.
그래서 결국 목구멍부터 항문까지 다 막혀, 물조차도 넘기지 못하여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암이 온몸에 다 펴져 있었고 시한부가 되어서야 알게 되지 않았는가! 이제껏 다섯째 시동생 가르치느라 죽을 둥 살 둥 버텨오다가 이제는 정말 죽기 직전까지 와버렸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나는, 다섯째 합격 소식을 듣고 ‘이제 되었다!’라며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동안 나를 가장 무겁게 짓누르던 커다란 짐 하나를 덜어 그렇게도 좋아했는데,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이제 또 아파트를 사주라니! 말 그대로 설상가상, 산 넘어 산이었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시어머니께서 결혼 직후부터 이제까지 맨날 나에게 찾아와 돈 가져가신 것을 다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모른다 해도, 다섯째 시동생 학교 보내느라 친정어머니를 포함한 우리 식구 모두가 얼마나 희생해 왔다는 것은 알 텐데, 우리는 꿈도 꿔보지 못한 아파트를 사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남편을 보며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동안 한 번도 어려운 내색을 하지 않던 내가 처음으로 남편에게 눈짓을 했다. 그래도 남편은 방바닥만 보며 가만히 있었다. 우리가 아무 말도 없자 시어머니는 목소리를 더 키워 또 재촉하셨다. “안 들리냐? 아파트 어떡할 거냐고? 엉?” 그래서 할 수 없이 남편을 가만히 찔렀더니 남편은 생전 처음으로 시어머니께 조용히 말씀드렸다.
“어머니, 동생은 이제 걱정 안 하셔도 알아서 잘할 거예요.” 시어머니는 대번에 안색이 어두워지시며 “느그들, 그것 하나 못 해준다고 그러냐? 징허다 그냥!” 하고 역정을 내시며 벌떡 일어나셨다. 놀란 내가 “어머니!”하고 붙잡았더니 확 뿌리쳐서 쇠약한 나는 땅바닥에 철퍼덕 쓰러지고 말았다. 말기 암으로 굳어가는 온몸에 강한 충격이 가해지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시어머니는 내가 사정없이 쓰러져 일어설 수도 없는데도 “너그들 다 필요 없어야!” 하시고는 휭하니 가버리셨다. 시어머니께서 화를 내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시어머니의 무리한 부탁을 처음으로 들어드리지 못한 오늘, 화나서 떠나가시는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저리도록 더 아파왔다.
남편은 시어머니가 가신 후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이의 침묵이 유난히 더 무겁게만 느껴졌다. ‘이제까지 죽을 둥 살 둥 그렇게 최선을 다해 시어머니의 청을 다 들어드렸는데...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생각하니 금방이라도 심장이 멎을 것같이 가슴이 시리고 저며왔다.
아픈 가슴을 애써 쓸어내렸지만, 병들어 아파서 시동생 아파트도 사주지 못하는 내 탓으로 시어머니가 화가 나서 가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시어머니로부터 사랑받은 셈 치고 그 상황을 시어머니의 변화를 위해 봉헌했다.
나는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해주시지 않은 것이 슬픈 것은 아니었다. 그런 말은 이미 들은 셈 치고, 그 무수한 냉대는 이미 사랑받은 셈 치며 다 봉헌했다. 아마 내가 죽음을 목전에 두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서글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어머니가 떠나시고 남편은 말없이 방을 나갔다. 깊은 정적 중에 나는 끝 모를 슬픔으로 여러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