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영상 “1주일 만에 2배 정도 자라난 암,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상태라고!”

운영진
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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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찬미 성모님! 인천지부 김은정 율리아입니다. 저는 1992년 11월쯤 예비자 교리를 받던 중 대모님 되실 분의 권유로 장부와 나주 성모님 경당을 다녀가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향유 흘리신 기념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장부는 안동의 오랜 구교 집안의 장손이었고 율리아 님과의 시간에도 밖에서만 배회했고 저는 대모님을 따라 정신없이 율리아 님과의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요.그때 저는 마치 향수를 쏟아부어 놓은 듯한 그런 짙은 향기를 맡으며 어떻게 시간을 보낸지도 모르게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까맣게 이곳 나주를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2018년 10월 19일 성모님 피눈물 흘리신 32주년 기념일에 인천 순례 버스를 타고 순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일터로 나오는데 그날은 아침 기도 중에 순교자 성월 기도문을 빼놓고 왔기에 스마트폰으로 그 기도문을 찾게 되었습니다.


근데 어느 분의 블로그에 나주 성모님 피눈물 흘리신 32주년 기념일에 오라는 글을 보게 되었고 그때서야 저는 나주 성모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하지만 교구에서는 인준이 안 나서 순례하면 안 된다고 또 자동 파문이 된다고, 그리고 제가 식당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본당의 신부님, 가톨릭 대학교의 교수 신부님들, 또 신부님 엄마들, 수녀님, 수도원의 수사님들이 단골손님이셨거든요.

 

그렇게 고민하다가 저는 장부에게 “함께 9일 기도를 바쳐보자.”고 부탁하게 되었고 그런 다음에 나주 순례 결정을 하려고 했습니다.


‘주님! 제가 나주를 한번 가보고 싶은데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가면 안 된다고 하니 제가 꼭 가야 할 곳이라면 주님, 성모님께서 인도해 주시라’는 지향을 두고 일 때문에 항상 피곤해하는 장부와 함께 10월 묵주기도 성월 첫날부터 기도를 드렸습니다. 결과는 제가 지금 이곳 나주 성지에 이렇게 서 있고 더 빨리 순례를 하지 못했기에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92년 나주 성모님 경당을 그렇게 잠시 다녀간 뒤로 순례를 시작하기 전까지 94년 첫째 딸을 8개월 만에 전치태반으로 하혈을 많이 하면서 낳게 되었는데 아기는 2.2kg 인큐베이터로 들어갔고 저는 출산 후 폐기흉으로 인한 호흡 곤란으로 인천 길병원 중환자실에서 호흡기를 낀 상태에서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정신은 너무도 말짱한데 제 주위에서 그렇게 저는 며칠 동안 많은 죽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희 대모님께서 면회 시간에 오셔서 기도를 해주시며 “율리아, 사람이 죽으면 내 사랑하는 남편, 부모, 형제, 자식들이 와서 슬프다고 울어줄 수는 있어도 그 무덤 속까지는 함께하지 못한다. 오직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만이 있을 뿐”이라며 “하느님께서 율리아를 많이 사랑하시기에 이 고통을 주는 것”이라며 기도해 주시고 가셨습니다.

그때 저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지금도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잘 모르겠지만 너무도 생생하여 아직까지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제가 깜깜한 터널 속을 병원 침대에 누운 채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밀듯이 앞으로 밀려가고 있는데 그 터널 끝에 밝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뭔가에 이끌리듯 제가 확 빠져나오게 되었는데 성모님께서 두 팔을 벌리시고 저를 꼭 안아주셨습니다.


그 후로 저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숨을 쉴 수가 있게 되었고 아기와 함께 너무도 정상적으로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식당을 하며 많은 돈을 벌게 되었지만, 어느 순간 장부에게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계속되는 사기 그리고 여러 가지 사건들로 상가 그리고 집 또 시댁의 상가와 아파트 그리고 모든 땅까지 다 정리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신용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율리아 엄마는 시어머니가 돈 해달라고 하셔서 많이 힘드셨는데 요즘 제가 느끼거든요. 근데 저는 그 반대였습니다. 그때쯤 18살의 딸아이는 집을 나가 방황하게 되었고 결국은 임신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로 인한 걱정과 한숨으로 그래도 내게 신앙이 있기에 예수님, 당신 십자가 발 언저리에서 제가 떠나지만 않게 해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다 2017년 흉선암을 선고받게 되었고 처음에는 5cm였으나 일주일이 지난 후 9cm가 되는 암의 크기가 순간순간 너무나도 크게 자라나는 매우 위험한 상태로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과 함께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수술을 마치고 의사는 정말 기적이라며 “누군가 기도를 많이 하시나 보다.”며 놀라워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율리아 님의 대속 고통이 아니었을까? 그 기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수술은 잘 끝났지만 저는 루푸스라는 희귀난치성 질환을 진단받게 되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약을 복용해야 하며 간단한 집안일도 힘들 수 있다고 어쩌면 5년밖에 살 수 없을 거라고 약을 꼭 복용하라고 했지만 저는 그렇게 정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빚이 남아 있고 또 생계를 위해서 또다시 식당 일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나주 순례를 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이 인천에서도 조금 떨어진 강화도라는 곳인데요. 주말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오기에 식당 문을 닫고 사실 첫 토 순례 오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32주년 기념일 순례를 마치며 돌아가는 새벽에 성모님 동산을 바라보며 ‘예수님! 저 여기 다시 오고 싶어요. 저 다시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마음속으로 기도드리며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날 율리아 님께서 너무 고통 중에 계셨기에 개인 만남도 못 한 채 5대 영성 책과 사랑의 메시지 등 몇 가지 성물과 함께 가지고 돌아가게 되었는데 돌아가서 자고 있는 동안 본당에서 총무도 맡고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했던 장부는 5대 영성 책을 읽고 “그동안 ‘어떻게 해야, 어떻게 살아야 과연 천국을 갈 수 있을까?’ 고민, 고민했는데 나주의 5대 영성만이 천국 가는 지름길임에 틀림없다.”며 “다른 건 몰라도 첫 토 순례는 보내주겠다.” 먼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얼마나 기뻐하며 감사드렸는지요. 잠깐 동안이었지만, 또 율리아님과 직접 만남을 못 해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갔지만 간절한 저의 마음을 주님, 성모님께서는 다 아시고 장부를 통해 다시 나주 성지로 불려주셨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1월 첫 토를 순례하게 되었고 십자가의 길 준비 기도를 하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저에게 일어난 그 모든 일들이 그 누구의 탓도 아닌 모두 다 저의 탓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성모님 경당 건축 헌금을 모금하셨는데 저는 돈은 없지만, 봉헌 드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하기에 수녀님께 여쭤봤더니 조금씩, 조금씩 봉헌 드려도 된다 하시기에 책정을 하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첫 토 때 처음으로 기적수를 택배로 부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1월 7일 강화군에서 주최하는 “최고의 미식 대전”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저희가 대상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강화도는 순무 김치가 유명한데요. 순무는 다른 무와 달리 수분이 없어서 김치 할 때 물을 좀 많이 부어야 되거든요.

 

그때 제가 ‘아, 나주 기적수를 한번 넣을까? 넣어보자.’ 그러고 장부와 함께 그렇게 기적수를 넣어서 만든 김치와 저희가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상 축하금으로 200만 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상품권으로 시상이 되었는데 저희 때부터 현금으로 지급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나주 성모님께서 함께해 주셨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 당시 경당 건축 1구좌 봉헌 금액이 딱 200만 원이었는데 다 봉헌 드리기도 전에 주님께서는 바로 갚아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돈이 없어서 간판도 못 하고 영업을 하였는데 2019년에는 “강화군 줄 서는 맛집”에 선정이 되어서 간판도 할 수 있었고 시설 개선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코로나로 인해 순례의 길이 막혔지만 2019년 4월부터 “할머니 나도 함께 나주 가고 싶어.” 하는 손녀딸과 함께 나주 순례를 하게 되었고 그해 7월에는 딸과 아들이 젊은이 피정에 참가할 수 있는 은총 또한 주셨습니다. 율리아 님과의 만남은 못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코로나 터지기 바로 직전 마지막 젊은이 피정에 아들과 딸을 불러주셨던 것은 정말 은총이었습니다.

순례하지 못하는 동안 율리아 님과 함께하는 묵상 프로젝트를 통해 저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힘듦을 5대 영성으로 봉헌 드려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프고 힘든데 식당 일을 계속해야만 하고 장부를 향한 조금의 원망도 있었고 열심히 산다고는 하는데 왜 이렇게 계속해서 돈 걱정을 하며 하루하루 보내야 하는 절망감도 있었으며 또 부모 형제에게도 맏자식으로서 사람 노릇을 못 하니까 늘 미안한 마음으로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자존심 상함도 있었어요.


이 힘든 상황에 딸아이 가정까지 돌봐야 했기에 딸에 대한 어쩌면 미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율리아 님의 그 삶을 통해 저의 이 모든 고통과 아픔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시간이 있었기에 제가 지금 이렇게 나주로 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1992년 그렇게 잠시 잠깐 이곳 나주를 다녀갔지만 까맣게 잊고 살다가 죽어 지옥에 밖에 갈 수 없었던 이 죄인이 율리아 님의 계속되는 대속 고통과 기도로 이렇게 저는 살아 있음을 감히 여러분들 앞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30여 년 전 중환자실에서 죽어갈 때 그 품에 안아주시어 살게 해 주신 그 성모님이 바로 나주의 성모님이셨음을 순례를 통해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피눈물 흘리신 32주년 기념일,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갈바리아 동산에서 신부님과 수사님, 수녀님들이 십자가 예수님 발을 만지며 기도를 할 때 제 눈에 예수님의 심장이 2번씩 뛰는 모습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아, 이곳은 정말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곳이구나.’ 그것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그동안 먹었던 약을 끊었고 지금까지도 약을 먹지 않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 약을 먹어야지만 살 수 있다고 했던 그 의사의 말을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나주에 계신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제 마음속에 메시지를 주셨다고 생각했기에 지금까지 약을 안 먹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몸 안에 염증 지수가 많이 오를 때도 있어 제가 밤이 되면 좀 통증이 심하지만 기적수를 마시며 생활의 기도로 율리아 님 고통 조금이나마 경감시켜 드리고 위로드릴 수 있도록 부족하지만 봉헌드리고 있습니다.

5월, 이 좋은 성모 성월, 첫 토에 이렇게 은총 나눔 할 수 있도록 안배해 주신 나주의 영광의 자비의 예수님과 성모님께 감사와 찬미, 영광 드리며 율리아 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살아가게 해 주심에 너무도 고맙고 고맙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여서 세상 것에 걱정과 시간을 보내고 5대 영성 무장하여 실천한다 하면서도 문득문득 화가 나면 참지 못하고 분열의 마귀에게 밥을 주곤 하지만 율리아 님의 양육으로 저의 영혼 육신의 빈곤함과 고통 잘 봉헌하여 주님께서 정하신 그 때가 되면 꼭 치유시켜주시리라 믿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 영광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은총 또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2023년 5월 6일 인천지부 김은정 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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