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1. 할아버지 눈 수술해 드리고자 미용실을 정리하다
나주 성모님께서 눈물 흘리시며 한국을 찾아오신 뒤, 매일 같이 밀려드는 수많은 순례자들로 미용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눈물 흘리시기 전부터 정 미용실은 손님이 4시간 넘게 기다릴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많은 순례자들까지 전국에서 몰려드니 얼마나 바빴는지 모른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봉 안드레아 할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드리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봉 할아버지 찾는 일만은 게을리하지 않고 내가 못 가면 친정어머니와 아이들이라도 꼭 들러 할아버지를 도와드리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방법을 써도 할아버지 눈이 보이지 않자, 나는 내 눈 하나를 할아버지에게 드리기로 굳게 결심했다.
할아버지가 단 하루만이라도 이 세상을 보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꺼이 내 눈을 드리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먼저 남편에게 허락을 구하고자 조심스레 입을 뗐다. “율리오씨 나 당신에게 부탁이 하나 있어요.” “뭔데?” “봉 할아버지께 내 눈 하나를 드리고 싶어요.” 남편은 고맙게도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나는 곧바로 광주에 올라가서 광주, 전라도에서 눈을 가장 잘 본다는 홍 안과에 갔다. 할아버지의 상태를 말씀드리니 원장님은 “아마도 시신경이 망가진 것 같습니다.” 하셨다. “그러면 제 눈 하나를 드리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아마도 불가능할 건데요.” “그럼 일단 한번 모시고 와볼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다음에 할아버지를 모시고 오기로 마음먹고 안과를 나왔다. 사실 그 당시 정 미용실에는 머리하러 온 손님과 순례자들이 뒤섞여서 운영이 무척 힘들었다. 나야 성모님께 대한 사랑으로 아무리 정신없고 힘들어도 성모님 사랑받은 셈치고 기쁘게 봉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종업원들은 그렇게 하질 못했다.
사람들이 미용실에 들어오면 내가 가르쳐줬던 대로 친절하게 “네, 어서오세요~” 했다가도, “어디서 성모님이 눈물 흘리셔요?” 하면 갑자기 퉁명스럽게 돌변했다. 미용사들이 눈을 흘기며 “저리로 가세욧!” 하니 놀란 순례자가 “저기 어디로요?” 하면, “골목으로 들어가란 말이에요!” 하고 화를 내다시피 말했다.
그러니 순례자들은 성모님을 뵙기도 전에 기분이 팍 상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내가 방에 있다가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얼른 나와서 “죄송합니다. 우리 미용사들이 신자가 아니어서 그런 거니 이해해주세요.”하고 용서를 청했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니 주님과 성모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미용실을 계속 운영할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봉 할아버지를 수술해드리기로 결심했으니, 나는 과감하게 정 미용실을 빨리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밀려오는 순례자를 맞이하기 위해서도 그랬지만, 할아버지가 입원하시게 되면 24시간 곁에서 돌봐드려야 하고, 수술 후 병간호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장부와 상의한 끝에 미용실을 속히 처분하기로 했다.
나는 처음 미용실을 시작할 때 내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적어도 10년은 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리고 우리 미용실은 86년도 당시 한 달에 순수익이 400만 원이나 되고 전국에서 찾아오는 아주 잘 되는 미용실이었다. 그러나 최대한 빨리 할아버지 눈을 떠드리고 싶어서 무척 싼 값에 내놓으니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너무나 아까워했다.
하지만 나는 제값 받은 셈치고 순례자들을 위해서, 또 봉 할아버지의 수술이 잘 되기를 지향하며 봉헌하니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눈물 흘리시는 성모님을 위해서, 또 봉 할아버지의 눈을 떠드릴 수만 있다면 내가 못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할아버지가 쥐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집을 보러 다니며, 이사할 준비를 했다.
821. 할아버지 눈 수술해 드리고자 미용실을 정리하다
나주 성모님께서 눈물 흘리시며 한국을 찾아오신 뒤, 매일 같이 밀려드는 수많은 순례자들로 미용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눈물 흘리시기 전부터 정 미용실은 손님이 4시간 넘게 기다릴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많은 순례자들까지 전국에서 몰려드니 얼마나 바빴는지 모른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봉 안드레아 할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드리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봉 할아버지 찾는 일만은 게을리하지 않고 내가 못 가면 친정어머니와 아이들이라도 꼭 들러 할아버지를 도와드리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방법을 써도 할아버지 눈이 보이지 않자, 나는 내 눈 하나를 할아버지에게 드리기로 굳게 결심했다.
할아버지가 단 하루만이라도 이 세상을 보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꺼이 내 눈을 드리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먼저 남편에게 허락을 구하고자 조심스레 입을 뗐다. “율리오씨 나 당신에게 부탁이 하나 있어요.” “뭔데?” “봉 할아버지께 내 눈 하나를 드리고 싶어요.” 남편은 고맙게도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나는 곧바로 광주에 올라가서 광주, 전라도에서 눈을 가장 잘 본다는 홍 안과에 갔다. 할아버지의 상태를 말씀드리니 원장님은 “아마도 시신경이 망가진 것 같습니다.” 하셨다. “그러면 제 눈 하나를 드리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아마도 불가능할 건데요.” “그럼 일단 한번 모시고 와볼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다음에 할아버지를 모시고 오기로 마음먹고 안과를 나왔다. 사실 그 당시 정 미용실에는 머리하러 온 손님과 순례자들이 뒤섞여서 운영이 무척 힘들었다. 나야 성모님께 대한 사랑으로 아무리 정신없고 힘들어도 성모님 사랑받은 셈치고 기쁘게 봉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종업원들은 그렇게 하질 못했다.
사람들이 미용실에 들어오면 내가 가르쳐줬던 대로 친절하게 “네, 어서오세요~” 했다가도, “어디서 성모님이 눈물 흘리셔요?” 하면 갑자기 퉁명스럽게 돌변했다. 미용사들이 눈을 흘기며 “저리로 가세욧!” 하니 놀란 순례자가 “저기 어디로요?” 하면, “골목으로 들어가란 말이에요!” 하고 화를 내다시피 말했다.
그러니 순례자들은 성모님을 뵙기도 전에 기분이 팍 상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내가 방에 있다가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얼른 나와서 “죄송합니다. 우리 미용사들이 신자가 아니어서 그런 거니 이해해주세요.”하고 용서를 청했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니 주님과 성모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미용실을 계속 운영할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봉 할아버지를 수술해드리기로 결심했으니, 나는 과감하게 정 미용실을 빨리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밀려오는 순례자를 맞이하기 위해서도 그랬지만, 할아버지가 입원하시게 되면 24시간 곁에서 돌봐드려야 하고, 수술 후 병간호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장부와 상의한 끝에 미용실을 속히 처분하기로 했다.
나는 처음 미용실을 시작할 때 내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적어도 10년은 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리고 우리 미용실은 86년도 당시 한 달에 순수익이 400만 원이나 되고 전국에서 찾아오는 아주 잘 되는 미용실이었다. 그러나 최대한 빨리 할아버지 눈을 떠드리고 싶어서 무척 싼 값에 내놓으니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너무나 아까워했다.
하지만 나는 제값 받은 셈치고 순례자들을 위해서, 또 봉 할아버지의 수술이 잘 되기를 지향하며 봉헌하니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눈물 흘리시는 성모님을 위해서, 또 봉 할아버지의 눈을 떠드릴 수만 있다면 내가 못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할아버지가 쥐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집을 보러 다니며, 이사할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