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 경당

“이곳은 많은 이들이 찾아와 회개의 은총으로 치유되는 영혼의 목욕탕이 될 것이며,

나와 내 어머니의 복합적인 성심의 사랑과 은총이 풍성하게 내리는 내 어머니의 집이 될 것이다.”

위치

지도를 더블 클릭하면 확대하여 볼 수 있습니다.

주소 전남 나주시 나주천 2길 12, 나주 성모 경당

전화  061-334-5003

시간  5:00 ~ 23:00

주차  가능

The Blesses Mother’s House

1층 - 전시실


나주의 징표를 모셔둔 곳, 징표 설명 판넬을 볼 수 있다.

1층 - 미디어실


나주 성모님과 관련된 다양한 영상 자료를 볼 수 있다.

1층 - 성물판매실


나주 성모님의 은총을 담은 성물들을 구매할 수 있는 곳

2층 - 경당


주요 징표들과 나주 성모님을 함께 모셔둔 곳

2층 - 경당 유아실


영, 유아와 보호자를 위한 공간

부속동 1층 - 식당


봉사자, 순례자들을 위한 식당

경당의 역사

1. 눈물의 시작, 정 미용실


(1) 미용실 자금 마련


1980년 8월, 율리아 자매가 말기 암을 치유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어머니가 아침 식전에 와서 또 “너희들 빚 좀 갚아라.” 하였다. 치유 받아 건강해진 율리아 자매는 자신 있게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무엇을 좀 해볼까?’ 생각하다가 ‘시어머니의 많은 빚을 갚으려면 미용실을 경영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 생각하고 또 큰 이모에게 부탁했더니 160만 원은 해줄 수 있다고 했다.


그 돈으로는 미용실을 할 수가 없었다. 자매는 본당 신부를 찾아가 “미용실을 하고 싶은데 신협에서 돈을 빌릴 수 없을까요?” 했더니 신협 전무를 소개해 줬다. 신협 전무가 대출을 해주겠다고 하여 미용실을 구하러 다녔더니 사백만 원이면 인수할 수 있는 미용실이 나왔다. 전무는 300만 원을 보증인도 없이 빌려주겠다고 했다.


남편에게 차마 시어머니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말은 못 하고 “아이들이 넷이나 되니 미용실을 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한다.”고 말하자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미용실 한다는 것 내가 잘못 들었지? “아니요, 잘 들으셨어요.” 하자, 남편은 “여보, 당신은 자리에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돼. 하느님이 겨우 살려내셨는데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하며 반대했다.


그러나 율리아 자매는 “아니에요, 저는 어떠한 일도 해낼 수 있는 강인한 힘이 있어요. 허락해주세요, 네?” 남편은 끝내 반대했지만, 자매는 ‘주님께서 살려주신 이상,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미용실 중개인과 미용실 주인을 식당에서 만나 계약서를 작성하고 식사하면서 남편을 불러 계약서에 도장을 찍도록 하였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계속 안타까워하며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러나 당신이 손님 머리해줄 생각일랑 절대 하지 말고, 미용사 구해다가 미용사가 하도록 해, 부탁이야.” 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2) 정 미용실 개업


율리아 자매는 마음이 급해 다음날 미용실을 개업하기로 하고, 광주 미용 재료상회(미용 재료도 팔고, 미용사 알선도 해주는 곳)에 들러 일류 미용사를 구해달라고 하니 “내일? 세상에 내일 개업할 사람이 오늘 일류 미용사를 구하다니, 일류 미용사가 얼마나 귀한데….”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웃었다.


그러나 율리아 자매는 일류 미용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자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감나무에서 홍시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에요. 일류 미용사가 나타나면 연락해 줄 테니, 개업을 보류하던가, 꼭 해야 한다면 보통 미용사 데리고 하세요.”


율리아 자매는 ‘주님, 일류 미용사를 보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하고 기도하자마자 어떤 아가씨가 들어와 “일류 미용사 구하는 데 있어요?” 했다. 자매는 ‘오! 하느님, 역시 제 기도를 들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하고 그와 함께 예정대로 개업하게 되었다.

(3) 기술자가 되다.


전에는 고데기로 머리를 했으나 이제 드라이로 하게 되었다. 율리아 자매는 드라이를 해보지 않았기에 “드라이 좀 가르쳐줘.” 하자 미용사는 “누가 배워서 한대요?” 했다. 자매는 얼른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며 ‘주님께서 빨리 배우라는 사랑의 신호야. 맞아, 미용사가 내게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야. 주님, 당신의 뜻을 잘 알았으니 그대로 할게요.’ 하고 밖을 보니 화장품 판매원이 지나가고 있었다.


자매는 그를 불러 의자에 앉히고 머리를 해준다고 했더니 처음에는 싫다고 하다가 “그래, 한 번 해봐요.” 하고 머리를 맡겼다. 자매는 처음으로 영업용 드라이기를 잡으니 무겁기도 하고 힘들었지만 “주님 함께 해주세요.” 하며 생활의 기도로 봉헌하며 정성스럽게 첫 번째 머리를 연습하였다. 머리가 끝나고 나서 그녀는 너무나 놀라 “아!” 하고 소리를 지를 때, 자매 또한 무척 놀랐다. “오, 주님!” 자매가 부르짖는 것은 주님뿐이었다.


머리가 잘못되어 소리를 지르는 줄 알고 눈이 동그래져 바라보니, 그녀는 “내가 이런 머리를 하고 싶어 미용실을 모두 다녀보았지만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광주 충장로에 있는 일류미용실에도 가보았지만 이렇게 마음에 드는 머리를 해주질 못했는데. 이제는 내 머리 걱정 안 해도 되겠네.” 하면서 5,000원을 내는 것이었다.


율리아 자매는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니, 돈을 주시다니요. 제가 연습했으니 모델값을 드려야지요.” 하고 돈을 돌려주었더니 빵이며 과자, 과일을 사다 주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 드라이는 1,000원이었는데, 그녀는 하고 싶은 머리를 처음으로 할 수 있게 되어 돈이 아깝지 않다며 “나 어디서 하던지 맘에 안 들어 드라이 포기했었어요.” 했다. ‘아, 주님은 못 하시는 일이 없으시구나.’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주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렸다.


(4) 미용실을 살림집과 합치다.


율리아 자매는 살림집에서 매일 미용실에 출퇴근했다. 남편이 퇴근길에 들러 방에서 기다리다 데려가기도 하지만 손님이 많을 때는 방을 써야 하니 남편이 먼저 가고 자매가 늦게 가다 보면 남자들이 따라다녀 곤욕을 치른 적이 많았다. 때마침 조금 아래에 집을 크게 지어 미용실을 살림집과 합쳐 쓰라는 제안이 들어와 1982년 4월 8일 미용실과 살림집을 합쳤다.


(5) 성모님 눈물 시작


1985년 6월 29~30일까지 율리아 자매는 광주교구 성령봉사회원들로 구성된 일행과 꽃동네를 방문하여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고, 6월 30일 밤 11시 10분경에 집에 도착했다. 밤 11시 55분경 율리아 자매는 죄인들의 회개와 불쌍한 이들을 위하여 묵주기도를 바치다가 방에 모신 성모님 상의 볼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자매는 수시로 성수를 사용했기에 ‘혹시 성수인가?’ 하고, 성수를 뿌린 뒤 아침 6시경에 일어나보니 뿌려놓은 성수는 다 마르고 양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날부터 성모님의 눈물이 시작된 것이다.


율리아 자매는 “어머니! 저에게는 모실만한 방도 없으니 성당으로 모셔야 합니까? 집에 계셔야 하옵니까? 말씀해 주소서.” “염려 말아라. 잘 참아왔다.” “아니 성당입니까, 집입니까?” “나는 네가 좋다. 나는 네가 좋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모든 것 도와줄 것이다.” 율리아 자매는 통곡했다.


“어머니 어찌하여 더 적합하고, 유능하고, 방도 있는 집으로 택하지 않으셨습니까? 너무 누추하고 초라하여 견딜 수가 없나이다. 어머니께 누가 되지 않는지요? 그러나 더욱 노력해서 어머니를 증거 하겠습니다.”

율리아 자매가 모신 성모님 상에서 눈물 흘리신다는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서 매일 구경꾼과 순례자들이 몰려와 하루에도 3~4천 명이나 되었고, 철야까지 하고 가는 순례자들이 있어 비좁은 살림집에 학교에 다니는 네 아이는 공부는커녕 잠잘 곳도 마땅치 않아 미용실 좁은 소파에서 자야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불평은커녕 5살 된 막내아들까지 순례자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했다.


매일 밀려드는 수많은 순례자를 비좁은 집에서 맞이하며 미용실을 운영하는 것은 무리였다. 당시 나주 변두리의 집 한 채 값이 70~100여만 원 했는데 손님들이 3~4시간을 기다리며 머리를 하던 정 미용실은 그만둘 당시 한 달 순수익이 3~400여만 원이나 되었다. 율리아 자매는 그런 미장원을 과감히 접고, ‘나주 성모님만을 위해 매진하리라.’ 다짐하면서 단독주택을 보러 다녔지만 마땅한 집이 없었다.


율리아 자매는 미용실도 하고, 봉사도 하고, 순례자들도 맞이해야 하니까 땅 보러 다닐 때는 생활의 기도로 봉헌하며 바쁘게 뛰어다녔다. 남편은 직장에 다니니 혼자 땅을 구하러 다녔는데 19세 소녀처럼 어리게 보이는 자매가 뛰어다니니 사람들이 돌았다고 했으나 그것을 오히려 사랑받은 셈치고 기뻐했다. 8월 8일, 율리아 자매는 할 수 없이 수강아파트를 사기로 결정했다.


2. 성모님을 수강아파트에 모심



(1) 수강 아파트 302호 구입


아파트는 당시 시세보다 비쌌지만 에어컨, 장독, 고급 장롱, 고급분재 20여 개를 그냥 준다고 하여 그대로 잔금을 치렀는데 아파트에 가보니 남아있는 것은 쓰레기뿐이었다. 하지만 율리아 자매는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 아파트를 소개해 준 앞집 개신교신자가 미안해하며 “욕을 해도 시원찮은데 기도와 미사까지 해주다니 과연 ….” 하였다.


 율리아 자매는 ‘내가 집을 조금 비싸게 산 셈 치면 되지 않는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원수도 아니고 단지 물욕에 넘어가 약속을 저버리고 다 가져갔으나 그것은 원래 그들의 것이 아니던가!’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내 작은 아기야! 바로 이곳은 많은 이들이 찾아와 회개의 은총으로 치유되는 영혼의 목욕탕이 될 것이며, 나와 내 어머니의 복합적인 성심의 사랑과 은총이 풍성하게 내리는 내 어머니의 집이 될 것이다.”

(2) 수강아파트 302호로 이사

1986년 8월 12일, 율리아 자매는 수강아파트 302호로 이사해 눈물 흘리시는 성모님 상을 안방에 모셨다. 자매는 처음으로 부부가 쓸 수 있는 방이 생겼지만 성직자의 성화와 낙태자들을 위해 정당한 부부관계를 첫날부터 봉헌했다.




(3) 나주 본당, 짧은 날의 외출


1. 나주 본당으로 모시다.


1986년 11월 5일 오전 9시 30분경, 박희동 요한 신부가 광주대교구 사제들이 성모님상을 모시고 기도해보자고 한다며 성경을 펼쳤을 때, 루가 1장 56절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석 달가량 함께 지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부분이 나오자 이 말씀처럼 나주 본당에서 3개월 모시고 기도한다며 모시고 갔다. 떠나기 전, 잘 다녀오시라고 성모님상의 손을 잡으니 따뜻하다가 뜨거워지기까지 했는데 가족과 여러 순례자도 다 느낄 수 있었다. 가시기 전 성모님상의 성모님은 얼마나 우셔서 왼눈이 퉁퉁 부었다 빠졌다 했으며, 입과 코가 삐뚤어지는 기막힌 현상이 일어났다.


2. 성체 조배하도록 조배실을 만들다.

성모님상은 나주 본당 사제관에 모셔졌다. 나주성모님은 율리아 자매에게 나주 본당에 성체조배실을 만들어 기도할 수 있도록 현시를 보여주셨다. 그래서 본당 원장 수녀가 그렇게 하도록 기도했는데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 나주 본당에서는 나주성모님 옆에 성체를 모셨다. 나주성모님은 나주성당에 3개월 동안 계시면서 신자들이 성체조배도 하게 하셨는데, 매일 눈물 흘리시던 성모님께서 나주성당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다.


3. 수강아파트에서 다시 눈물을


1987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에 나주 본당으로 외출 가셨던 성모님이 수강아파트로 돌아오셔서 2월 21일 날부터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셨다.



3. 성모님 경당으로


1. 경당 조성 과정


a. 경당 부지 마련


성모님 집 마련을 위하여 많은 날을 나주시 전체를 돌아다녔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1987년 8월 10일, 율리아 자매는 환시 중에 본당 신부님과 두 수녀님과 함께 산을 보러 갔다. 중턱쯤 올라가니 자연으로 된 집이 원두막처럼 있어 “어머 이런 곳에 이런 좋은 집이 있었다니!” 하며 올라가 앉았다. 그때, 율리아 자매는 산을 보러 다니던 중이었기에 그런 장소를 찾아보니 정말 있었다. 그래서 본당 신부와 파 신부에게 말했더니 빨리 보자고 하였다.


1987년 8월 18일 오전 10시, 율리아 자매는 최 요한 형제에게 부탁하여 파 신부와 땅을 보러 가기로 했는데 성모님이 눈물을 흘리시어 시간이 지체되었다. 요한 형제가 밖에서 기다리다 너무 답답해 방문객을 확인하는 구멍으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그곳에 찬란한 빛으로 후광을 장식한 성모님이 서 계신 모습을 보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보고 또 보았지만 여전히 성모님이 서 계셔서, 밖에서 보이는 구멍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기도가 끝나자 방 안으로 들어와 보니 아까 본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밖에 나와 또다시 확인해보고 나서야 현존하시는 성모님이셨음을 깨닫고 성모님의 눈물을 목격하면서 확실한 부르심이라고 냉담을 풀고 성당에 나오기로 결심했다. 바로 그때 너무나 심했던 당뇨병과 고혈압, 심장질환도 깨끗이 치유되었다.


산을 본 파 신부는 너무 아름답고 공기도 좋다고 땅을 사라며 어디에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고 어디에 성전을 짓자고까지 했다. 그 근방의 땅을 다 사야 하는데 돈이 문제였다. 그때 심장병과 피부병. 관절이 치유되고, 부부간의 갈등과 고부간의 갈등이 해소된 서울 프란치스카 자매가 그 땅을 사주기로 했다. 운수업을 하는 그 집은 버스만도 100대 이상이 있는 부잣집이었다. 그 땅만 사준다면 그 주위 땅은 우리가 사려고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네가 할 수 없다고 연락이 왔다. 앞이 캄캄해졌다. 파 신부와 본당 신부도 포기하라고 했다. 그 뒤 빨리 구하지 못하자 본당 신부가 다시는 성모님집과 관계된 얘기를 거론하지 말라고 역정을 냈다.


많은 곳을 돌아보면서 마땅한 땅을 찾아 계약하려면 성모님 모시는 곳인 줄 알고 처음보다 터무니없이 비싸게 불렀다. 마음에 드는 곳은 많이 비쌌지만 그래도 사려고 복덕방에 가면 팔지 않겠다고 했다. 여러 곳을 다녔으나 짜고 하는 것처럼 모두 다 그랬다. 좋은 땅은 비싸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가격이 마땅한 곳을 찾아 헤매다 보니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2000년 전,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한 것처럼, 율리아 자매에게도 “성모님이 계시다면 땅을 마련해 주실 텐데 왜 고생하고 다녀? 성모님께 부탁만 하면 될 텐데?...” 하면서 어리석게 고생한다고 조롱하고 비웃으면서 비아냥거렸다. 율리아 자매는 “수고한다.” 는 말을 들은 셈 치고 봉헌했다.


도움 없이 매일 땅 보러 다니면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은 얼마였던가! 그러나 율리아 자매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곤욕도, 수치와 모욕과 입에 담지 못할 험한 욕설도 기쁘게 받으리니 제가 받는 고통을 통해서 끝없이 펼쳐지는 주님과 성모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작은 희생이지만 발걸음 하나하나를 기쁘게 봉헌하오니 작은 자의 사랑의 길이 얼마나 복된 길인가를 모두가 느끼게 해주시어요. 아빠, 엄마! 저 혼자 할 수 없으니 도와주셔요.’ 간절히 기도하던 중 현시로 성모님 모실 부지를 보여주셨다. 그 땅을 찾아내 본당 신부에게 말하니 성모님께서 준비하고 계셨던 거라며 땅을 사도록 허락했다.


1987년 9월 6일, 나주시 교동 소재 430평을 샀는데 주인은 원래 그 땅을 평당 12만 원 받으려고 했지만 성모님께서 그날 58,500원에 살 수 있도록 주관해주신 것이다. 그 땅은 길도 찾기 어렵게 대나무와 수풀로 가득해 사람들이 전혀 다닐 수가 없었지만, 조금만 수고하면 될 것이기에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 나의 주님! 성모님! 당신께서는 저를 그렇게도 많이 사랑하셔서 희생 제물로 쓰셨군요. 땅이 어디에 있다고 말씀해주실 수 있는데도 희생이 필요했기에 그동안 많은 눈물을 통해서 그 눈물 한 방울, 발걸음 단 한 걸음도 빗나가지 않고 오로지 봉헌하게 하셨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무엇이 있겠나이까? 고통을 통해서만이 영광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씀해주시는 님이시여, 찬미 받으소서.”


9월 12일, 하루빨리 집을 지어야 하기에 땅을 파고 고르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곳은 쓰레기 매립장이었다. 파고 파도 계속 쓰레기가 나왔다. 가족이 다 나섰는데 비닐에 싸서 버린 음식들이 썩은 물과 함께 쏟아져 나와 냄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율리아 자매 모친은 “이런 쓰레기장에다 성모님을 모셔도 되냐?” “어머니, 우리 성모님은 뱀을 짓밟으셨는데 쓰레기 같은 이 세상을 다 짓밟아 정화시키시려나 봐요.”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 하였다.


그때 상큼한 향기가 스쳐갔다. 모친은 “우메,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이 쓰레기장에서도 향기가 난다.” 하며 모두 놀랐다. 가족이 합심하여 매일 생활의 기도로 봉헌하면서 향기를 맡은 셈 치며 비닐에 쌓인 쓰레기들을 수거했다. “성모님께서는 ‘뱀을 짓밟는 나의 능력으로 너희를 도우리라’ 하시더니 이 많은 쓰레기를 밟아 모든 자녀가 새로 태어나기를 원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니 생활의 기도로 모든 것을 기쁘게 봉헌할 수가 있었다.




b. 성모님 경당 신축


쓰레기나 비닐이 안 나올 때까지 땅을 골라 경당을 40평으로 지었는데 사무실 방과 순례자들이 머물 수 있도록 방 3개를 미닫이 방으로 만들어 순례자가 많을 때는 미닫이를 열도록 했다.


① 성모님을 경당으로 모시다.


1987년 12월 8일, 성모님은 계속 눈물 흘리셨는데 함께 기도하던 형제자매 모두 목격하였다. 마리아 신학박사인 르네 로랑땡 신부가 성모님을 위로하시고자 그 먼 길을 왔다. 미사는 로랑땡 신부, 파 신부, 정 프란치스꼬 총장 신부, 백 마태오 신부, 박 마지아 신부가 공동 집전하였다. 미사 후, 눈물 흘리시는 성모님상을 낮 12시 30분에 모시고 가는데 긴 행렬은 아파트에서 경당까지 이어졌다. 성모님집 축성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600여 명이 참여하여 철야기도로 이어졌다. 여러 가지 향기를 풍겨 주셨는데 장미향기, 백합향기, 향내음, 한약 달이는 내음 등을 풍겨 주실 때 많은 순례자가 울면서 크게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다짐했다.


② 성모님 경당 앞에 길이 나다.


성모님 집을 짓기 전에는 오솔길 같은 작은 길이 있었는데, 경당을 지어 들어가자 갑자기 시에서 시멘트로 포장해 길을 크게 내줬다. 동네 주민들은 경당 지으면서 성모님의 집에서 한 줄 알고 성모님 집에 고맙다고 인사할 정도였다. 지름길인 그 길로 다니려면 밤에 귀신이나 뱀이 나올까 봐 저 뒤로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③ 나주 일대에 내린 집중 폭우


1989년 7월 25일, 태풍 주디가 전라도에 집중 폭우를 내려 전화도 불통 되고, 경당 앞 다리가 무너지고, 집이 두 채나 떠내려갔다. 경당 바로 밑에 슈퍼도 통째로 떠내려갔다. 다음 날은 경당 2~300m 위에 있는 저수지가 금이 가 터질 우려가 있어 나주 시민 모두에게 대피령이 내려졌다. 사람들은 성모님만 모시고 대피해야 한다면서 아주 중요한 물건만 챙기라고 차까지 대기시켰다. 하지만 율리아 자매는 생활의 기도로 봉헌하며 무사하리라고 믿고 성모님과 함께 밤새워 기도하였다.


그때 저수지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엄청난 물이 폭포수처럼 내려오는 데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경당 반대편 석축을 무너뜨리고, 경당을 지나서는 경당 쪽에 지어진 바로 밑의 슈퍼를 휩쓸어 갔다. 당시 태풍으로 인해 영산강 둑도 터져 많은 집이 떠내려가고 아파트도 잠겨 이재민이 수없이 생겼다. 나주 시내에서 집이 떠내려가지 않은 곳도 물이 많이 차니까 화장실 똥물이 집 전체에 섞여 먹을 것도 다 오염되었고, 영산포 일대가 물에 다 잠겼으며 기차, 버스, 전화도 모두 끊겼으나 경당만 무사했다.


④ 성모님집 앞 개천에 다리를 놓다.

1991년 3월 28일, 순례자들이 “개천을 건너오고 건너가려면 성모님의 집 가까운 곳에 다리가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 하였다. 율리아 자매는 ‘주님, 당신께서 해주실 수 있으시지요? 당신께 맡길게요. 해주셔도 감사, 안 해주시면 희생으로 봉헌할 수 있으니 감사, 모든 것이 감사뿐이랍니다.’라고 기도했다. 사흘 뒤, 율리아 자매 모친이 밖에 나갔다가 오더니 “네가 원했던 다리가 만들어진단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어찌 그리도 세심하게 배려하시는지요.’



c. 경당 증축


1990년 7월 27일 오전 10시경, 당시 순례자들이 많은데 경당이 너무 좁아 증축공사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성모님상을 비디오방으로 모셨는데 눈물을 흘리셨다. 냉담 중이었던 공학박사 장기성 시몬 형제는 이때 성모님의 맥박을 느끼고 “살아있는 생명체로 몸 전체가 생명이 박동하는 것 같다.”며 열심히 성당에 다닐 결심을 했다.


8월 1일, 경당 증축을 위해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써 영수증과 함께 네 사람이 서명해 성모님 발밑에다 넣고 기도했는데 공사를 마무리 지으려면 천만 원 정도가 부족했다. 그때 서울에서 온 송호림 장군(육군 중장으로 예편해 제9대 국회의원과 전남도지사 역임)이 혹시 돈이 부족하지 않느냐고 묻고는 부족한 천만 원을 보내주겠다고 하자 율리아 자매는 “신부님을 통해서 받겠습니다.” 했다. 그 돈으로 마무리 공사를 하니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8월 11일, 선금 칠백만 원을 받고 경당 증축을 하던 업자가 시멘트 파동이 나자 기소만 해놓고 도망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한 형제는 하나뿐인 성모님 집 차량을 고의로 깊은 물속으로 몰고 들어가 폐차 직전이 되어 많은 돈이 들어갔다.


30일, 율리아 자매가 파 신부에게 전화해 “업자가 ‘천여 명의 순례자가 오는데 화장실 3개는 부족하다.’면서 화장실을 그냥 더 만들어주겠고 합니다.” 하자 파 신부는 버럭 화를 내며 “외국에 가도 밖에서 볼일 보고 비행장에서도 밖에서 볼일 보는데 무슨 화장실을 늘리느냐?”며 오랜 시간 질책했다.


율리아 자매는 “잘못했다. 화장실 더 안 짓겠다.”라고 울며 사정해 겨우 신부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매는 토끼 눈이 되었으나 경당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할머니들에게 가서 기도해주고 포옹하였다. 할머니들은 작은 영혼의 눈물을 보고 덩달아 눈물을 흘리면서도 좋아하였다.


10월 1일, 증축한 경당에 성모님을 모셨다.


4. 외출, 다시 돌아오시리


2013년 12월 17일 새벽, 1985년부터 눈물과 피눈물을 흘려주시며 온몸을 다 짜내어 향유와 참젖을 주셨던 성모님 상이 도난을 당했다.


경당에 모신 성모님 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단에는 아크릴 창을 설치하여 자물쇠로 잠가놓았으나 아크릴 창의 자물쇠가 부수어져 있었고, 경당 앞의 작은 출입구도 열린 상태였다. 도난 즉시 경찰에서 수사했지만 아무런 단서도 없이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다. 2013년 12월 20일, 성모님 집은 성모님 상 도난 사건 경위 보고서를 프란치스코 교황께 긴급 제출했다.


5. 경당 재건축, 새로운 시작


1. 성모님의 집, 경당 화재


1) 경당 화재


2015년 3월 22일 새벽 3시경, 눈물 흘리신 30주년 준비를 위한 준비위원 모임이 성모님동산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시간에 화재로 경당이 전소되었다. 원인은 누전으로 진단되었다. 이러한 일에 대해 율리아 자매는 불나기 한참 전부터 “누전으로 불날 수 있으니 점검해야 한다.”며 여러 번 주의하라고 경고했는데 점검이 되지 않아 불이 나게 된 것이다.


2) 경당 화재 속에서의 기적


① 성체 강복해 주시는 성체는 성광 안에 녹아 그 형태 그대로 있었고, 94년 11월 24일 율리아 자매에게 내려주신 두 성체를 모신 작은 성합도 타지 않고 두 성체가 성합 안에 녹은 그대로 보존되었다.


② 경당 뒤채와 옆집 두 채에는 많은 전선이 연결돼 있었고, 경당 안에는 기름이 가득 찬 기름통과 지하 보일러실에도 큰 기름통이 있었다. 소방관들은 ‘이런 상태면 이웃집과 옆 건물이 다 탔을 텐데 이만한 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하였다.


③ 가장 큰 기적은 수 신부가 불길 속에서도 살아난 것이다. 율리아 자매는 불이 났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예수님 성모님! 당신께서는 하실 수 있으시죠? 경당은 다 타더라도 수 신부님 빨리 꺼내주십시오.” 계속 기도하자 성모님께서 “그래,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길 인도하리라.” 하셨다. 성모님께서는 타오르는 불길과 캄캄한 연기 속에서 문도 못 찾는 수 신부가 문을 열고 탈출할 수 있도록 안전하게 인도하신 것이다.


④ 눈물과 피눈물이 한꺼번에 흘러내린 받침보 중 천상의 향기가 가장 많이 난 중요한 받침보는 율리아 자매가 순례자와 만남을 할 때 기도해주는 기도 가방 속에 있었기에 안전했다.


"새로운 탄생이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고통이 뒤따른다는 것을 명심하고 더욱 사랑의 힘을 발휘하여 영웅적으로 충성을 다할 때 혼란의 어두움은 패망할 것이니 결과에 대하여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고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여라." 


2001. 11. 24 예수님 사랑의 메시지


"나는 보이지 않는 현존으로 너희를 도와줄 것이며 또한 너희의 도움을 받아 사탄이 파괴해 버린 곳 까지 새롭게 부활시킬 것이며 티 없는 나의 성심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2002. 1. 6 성모님 사랑의 메시지


2. 경당 재건축


1) 건축위원회 구성


화재로 2015년 3월 22일 전소된 경당을 건축하기 위한 건축위원회가 2017년 6월 17일 발족되었다. 건축위원회는 투명한 건축사업 진행을 위하여 신립금 현황, 건축사업 추진사항을 매월 첫 토요일에 순례자들에게 보고하고 지부장 회의를 통해 상세한 추진현황을 보고하였다.


2) 기본설계


신축 경당의 기본설계 수행을 위해 국내에서 성당, 수도원 등 교회 건물 설계에 경험이 풍부한 설계업체를 선정하여 설계를 완성하였다.

규모: 지하 1층, 지상 2층 (경당, 부속건물) 대지면적: 2,021 제곱미터 건축면적: 959 제곱미터


3) 기공식


2017년 10월 14일 피눈물 31주년 기념일 오후 1시, 경당 기공식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과 외국 순례자들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극심한 고통 중이던 율리아 자매도 참석하여 사제들과 함께 경당 터 곳곳을 돌아다니며 생활의 기도를 바치면서 성수를 뿌렸는데 하얀 젖 빚으로 변화되기도 했다.


시삽을 할 때 율리아 자매는 흙을 세 번이나 가득가득 퍼서 ‘세상의 모든 성직자와 사람들의 뿌리 깊은 악습들과 마귀들을 멀리 날려 완전히 없애주시고, 모든 이가 그 위에 반석 같은 집을 지어 천국을 얻을 수 있도록’ 생활의 기도를 봉헌하면서 있는 힘껏 날렸다.


4) 나눔의 잔치


경당 건축을 위한 나눔의 잔치를 첫 토요일인 2018년 5월 5일 성모동산에서 개최하였다. 이날 각 봉사단체에서 건축 기금마련을 위해 다양한 음식 준비와 기증받은 물품들을 판매하면서 천여 명의 순례자들과 함께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시간을 가졌다.


5) 준공 및 봉헌식


2018년 6월 30일, 성모님 눈물 흘리신 33주년 기념에 참석한 주교들과 20여 명의 성직자가 국내외 순례자 500여 명과 함께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6) 신립서 봉헌 현황 및 봉헌자 관리


봉헌자 관리

- 율리아 자매의 기도 봉헌

- 미사 봉헌

- 신축 경당 제단 밑에 봉헌자 명단을 밀봉하여 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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