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대성병원에서 새로운 치료를 시작했다. 친정어머니는 다섯째 시동생이 사법고시 합격할 때까지 들어가는 많은 돈을 마련하시기 위해 농사지으시느라 시골로 가시며, 아픈 내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시려고 셋째를 데리고 가셨다. 그래서 나는 홀로 세 아이들을 돌보고 살림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간을 쪼개어 영암까지 버스를 타고 병원을 다닌다는 것은 참으로 눈물겨운 길이 아닐 수 없었다. 큰아이들 학교 보내놓고, 막내 아이 우유 데워 먹여 잠재워놓고, 살아보기 위하여 매일 집에서 정류장까지 그 먼 거리를 걷지도 잘 못 하는 내가 겨우겨우 엉거주춤 기다시피 가야 했다.
홀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영암 병원에 다니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도 어려운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한 번 병원에 다녀오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초죽음이 될 정도였다. 몸이 안 좋아 오가는 시간이 많이 걸리니, 오전 내내 병원에 간신히 다녀오고 나면, 초죽음이 된 몸을 겨우 일으켜 오후에는 엉거주춤 기다시피하여 집안일을 해야 했다.
어떤 것을 두고 고통이라 하는가? 돈이 있으면 택시라도 탈 수 있고, 큰 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즈가 터져 나왔다는 말을 들은 군서 병원과 한의원, 영암 대성병원 원장들 모두 수술했던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하지만, 실상은 시어머니께 계속 돈 대드리느라고 돈이 없어 갈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은 차마 누구에게도, 친정어머니께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군서 병원에 다니길 3개월, 한의원에서 치료받길 보름, 영암 대성병원 다니길 2개월을 매일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어도 이상하게도 전혀 차도가 없었다. 약도 거르지 않고 복용하였지만, 오히려 하루하루 악화되어만 가니 나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부르며 ‘오, 하느님, 불쌍한 저를 도와주소서. 불쌍한 우리 어머니와 아이들을 봐서라도 부디 저를 살려주시어요.’ 하고 눈물로 기도드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고 의지할 수도 없는 내 처지가 처량하기만 했다.
죽으면 현재의 고통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대로는 결코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엄마의 손길이 꼭 필요한 토끼같은 네 아이들과 딸 하나를 위해 살아오신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가! 그래서 그 고통스러운 길을 ‘계속 남편이 나를 자가용으로 데리고 다니는 셈 치고’ 봉헌하면서 다녔다.
그것은 처참한 고통 속에서 살아보려 발버둥 치는 나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인 것 같았다. 얼마 되지 않는 병원비조차 어렵게 친정어머니께서 힘들게 벌어주신 돈으로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행여 시어머니가 또 찾아오셔서 돈 달라고 하실까 봐 매일매일을 노심초사하며 얼마나 조마조마했던가!
마음도 몸도 너무나 약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 혼자의 몸이 아니었기에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죽는 그 순간까지 건강한 셈 치고 끝까지 살아 나의 몫을 다해보리라, 기필코 죽음에서 새 삶으로 도전해 보리라!’ 하고 수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5개월 보름, 살기 위해 피눈물 흘리며 다니던 길
영암 대성병원에서 새로운 치료를 시작했다. 친정어머니는 다섯째 시동생이 사법고시 합격할 때까지 들어가는 많은 돈을 마련하시기 위해 농사지으시느라 시골로 가시며, 아픈 내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시려고 셋째를 데리고 가셨다. 그래서 나는 홀로 세 아이들을 돌보고 살림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간을 쪼개어 영암까지 버스를 타고 병원을 다닌다는 것은 참으로 눈물겨운 길이 아닐 수 없었다. 큰아이들 학교 보내놓고, 막내 아이 우유 데워 먹여 잠재워놓고, 살아보기 위하여 매일 집에서 정류장까지 그 먼 거리를 걷지도 잘 못 하는 내가 겨우겨우 엉거주춤 기다시피 가야 했다.
홀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영암 병원에 다니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도 어려운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한 번 병원에 다녀오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초죽음이 될 정도였다. 몸이 안 좋아 오가는 시간이 많이 걸리니, 오전 내내 병원에 간신히 다녀오고 나면, 초죽음이 된 몸을 겨우 일으켜 오후에는 엉거주춤 기다시피하여 집안일을 해야 했다.
어떤 것을 두고 고통이라 하는가? 돈이 있으면 택시라도 탈 수 있고, 큰 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즈가 터져 나왔다는 말을 들은 군서 병원과 한의원, 영암 대성병원 원장들 모두 수술했던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하지만, 실상은 시어머니께 계속 돈 대드리느라고 돈이 없어 갈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은 차마 누구에게도, 친정어머니께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군서 병원에 다니길 3개월, 한의원에서 치료받길 보름, 영암 대성병원 다니길 2개월을 매일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어도 이상하게도 전혀 차도가 없었다. 약도 거르지 않고 복용하였지만, 오히려 하루하루 악화되어만 가니 나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부르며 ‘오, 하느님, 불쌍한 저를 도와주소서. 불쌍한 우리 어머니와 아이들을 봐서라도 부디 저를 살려주시어요.’ 하고 눈물로 기도드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고 의지할 수도 없는 내 처지가 처량하기만 했다.
죽으면 현재의 고통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대로는 결코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엄마의 손길이 꼭 필요한 토끼같은 네 아이들과 딸 하나를 위해 살아오신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가! 그래서 그 고통스러운 길을 ‘계속 남편이 나를 자가용으로 데리고 다니는 셈 치고’ 봉헌하면서 다녔다.
그것은 처참한 고통 속에서 살아보려 발버둥 치는 나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인 것 같았다. 얼마 되지 않는 병원비조차 어렵게 친정어머니께서 힘들게 벌어주신 돈으로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행여 시어머니가 또 찾아오셔서 돈 달라고 하실까 봐 매일매일을 노심초사하며 얼마나 조마조마했던가!
마음도 몸도 너무나 약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 혼자의 몸이 아니었기에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죽는 그 순간까지 건강한 셈 치고 끝까지 살아 나의 몫을 다해보리라, 기필코 죽음에서 새 삶으로 도전해 보리라!’ 하고 수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