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프로젝트

주님께서 예비하신 삶

💗「주님께서 예비하신 삶」- 806화. 김대건 신부님의 손에서 뜨거운 순교의 얼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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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님의 손에서 뜨거운 순교의 얼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필리핀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인 5월 22일은 그토록 기다리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는 날이었다. 한국에서는 김수환 추기경님과 윤공희 대주교님, 그리고 김남수 주교님까지 이 역사적인 자리를 빛내기 위해 멀리서 참석하신다고 했다. 롤롬보이 현지의 신자들은 김대건 신부님에 대한 지극한 공경심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이토록 뜨겁게 존경받으시는 김대건 신부님의 위상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가슴 벅차올라, 나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며 감격의 이슬방울이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거리의 모퉁이마다 김 신부님의 동상 제막을 알리는 화려한 현수막이 즐비하게 붙어 있었고, 현지 신자들은 안드레아 신부님의 초상이 예쁘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나 역시 그 티셔츠를 몇 벌 선물 받게 되었다. 호텔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깊은 밤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던 순간에 오기선 신부님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율리아, 내일 아침에 올 때 가지고 온 한복 중에서 가장 고운 것으로 골라 차려입고 나와야 해. 제막식에서 주교님께 선물을 증정하는 뜻깊은 역할을 우리 율리아가 하도록 내가 미리 준비해 두었거든.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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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말씀에 나는 깜짝 놀라며 사양했다. “신부님! 저는 너무나도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 말고 다른 훌륭한 자매님을 시키면 안 될까요?” 그러자 오 신부님께서는 인자하면서도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이 자리에 우리 율리아보다 더 순수하고 나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느냐? 다른 생각 말고 오직 순명해라, 알았지?” 하셨다.
 
평소 나는 남들 앞에 드러나는 것을 도무지 원치 않았지만, 신부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명하는 마음으로 “네, 신부님.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준비할게요.” 하고 순순히 대답했다. 다음 날 제막식 당일, 나는 신부님의 당부대로 오색 빛깔 고운 색동저고리에 붉은 단풍 빛깔의 치마를 정성껏 차려입고 식장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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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나는 행사장 한가운데에 흰 천으로 꽁꽁 싸여 있는 김대건 신부님의 동상에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한 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마침내 제막식이 시작되자, 나는 신부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깊은 존경을 담아 마음속으로 간절히 부르짖기 시작했다. ‘김대건 성인이시여! 부족하온 이 죄녀에게 영적인 한 말씀만 들려주소서.
 
저는 신부님을 지극히 존경하고 사랑하나이다. 하오니 이 밤, 불타오르는 제 영혼 안에 신부님이 간직하셨던 그 고결하온 순교의 얼을 깊이 심어주소서. 부족한 이 죄녀가 지난 1984년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날에 저 외딴 도초 공소에 내려가 당신의 생애와 신앙을 교우들에게 전했던 눈물겨운 순간이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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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당신께서는 자비로우신 주님과 함께 부족한 저를 많이 도와주셔서, 얼음장보다 더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 섬사람들의 마음을 봄날의 눈 녹듯 가뿐하게 녹여주셨지요. 김대건 신부님,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나의 간절한 생활의 기도가 막 끝남과 동시에, 김대건 성인의 동상을 단단히 싸매두었던 커다란 흰 천이 스르륵 끌러져 아래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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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바로 그 극적인 순간, 나는 너무나 영적 충격에 휩싸여 손가락 하나조차 까닥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온몸이 마비되어 굳어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시공간이 멈춰버린 듯 지극히 깊고 신비로운 황홀경에 완전히 빠져든 상태였다. 천이 벗겨진 동상 자리에 있어야 할 차가운 동상은 간데없었다.
 
그 자리에 생생하게 살아계신 김대건 신부님께서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황금빛 광채에 휩싸인 채 서 계신 것이 아닌가! 신부님은 눈처럼 하얀 장백의 위에 보혈을 상징하는 새빨간 영대를 걸치시고, 머리에는 갓을 쓰신 채 참으로 늠름하고 당당한 풍채로 우뚝 서 계셨다. 신부님의 손에는 악의 세력을 처단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승리의 빨마가지를 들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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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위로는 수많은 천사가 거룩하게 호위하며 옹위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김대건 성인께서 나를 바라보시며 아주 다정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리고는 우렁차면서도 한없이 친절한 음성으로 내 영혼을 향해 말씀해 주셨다.
 
“우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한 특은을 받은 복된 딸이여! 오류와 죄악으로 물든 이 눈먼 세상이 그대를 이해하지 못하여 수많은 환난과 모진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항상 지름길로 인도하시는 천상의 엄마를 따라서 순교의 정신으로 똑바로 나아갈 때 내세에서는 나와 함께 영원한 천상 가정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오.
 
작은영혼이 걸어가는 이 사랑의 길이 비록 인간적으로는 몹시 어렵고 고통스러우며, 때로는 사무치게 고독하고 비좁은 험난한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오직 주님을 위한 아름다운 순교로써 주님을 위하여 기쁘게 바칠 수 있도록 어서 나와 손을 맞잡기 바라오. 나 또한 천상의 엄마와 함께 그대의 모든 여정을 발맞추어 도울 것이오.”
 
신부님께서 나를 향해 커다란 손을 따뜻하게 내밀어 주셨다. 나는 그 거룩한 초대에 이끌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재빠르게 성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내 손에 닿은 신부님의 손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맞잡은 손의 경계를 통하여 한 줄기 강렬한 불꽃처럼 전달된 그 뜨거운 영적 기운은, 순식간에 내 온몸 전체와 핏줄 구석구석으로 세차게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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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혼과 육신을 불타는 순교의 얼로 무섭게 달구어 주셨고,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천상의 환희에 깊이 벅차올라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한 채 오직 감격의 눈물만을 하염없이 흘릴 뿐이었다. 그렇게 영원 같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를 인자하게 바라보시던 김대건 성인은 어느덧 수많은 천사와 함께 하늘을 향해 가뿐히 오르시어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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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황홀경에서 깨어난 내 눈앞에는 방금 전 보았던 성인의 동상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오기선 신부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아, 율리아! 도대체 거기 서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어서 빨리 앞으로 나와서 주교님께 선물을 증정해 드려야지!” 하시는 것이었다.
 
천상의 신비에 취해 아직은 채 진정되지 않은 손과 발, 그리고 온몸이 사르르 떨려왔지만, 나는 마음을 굳게 가다듬고 정성껏 준비된 선물을 주교님께 공손히 증정해 올린 뒤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속으로 간절히 고백했다. ‘오, 주님! 저의 전부이신 나의 님이시여! 부족한 이 죄녀에게 이토록 과분한 은총을 내려주시니 진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제가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하며 평생 따르고자 했던 거룩한 성인의 뜨거운 손을 직접 잡았으니, 이제 제 남은 삶을 주님을 위한 피 흘림 없는 순교의 제물로 바칠 것을 굳게 약속하겠나이다.’ 하고 영혼 깊은 곳에 단단히 다짐했다. 그날 행사장에서 한국 교회의 큰 기둥이신 김수환 추기경님과 우리 교구의 윤공희 대주교님을 직접 만나뵙게 되었다.
 
두 분 모두 나를 보시며 마치 친자식을 만난 듯 너무나도 반갑게 맞아주셨다. 특히 윤공희 대주교님께서는 인자하게 웃으시며 “우리 율리아가 이번에 한국 대표, 아니 우리 광주대교구를 대표하는 대사로 이 먼 곳까지 온 거야?” 하시며 농담 섞인 칭찬을 건네셨다. 나는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대주교님, 참된 대표는 여기 계신 추기경님과 대주교님이시지요. 저는 그저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하고 화답을 했다.
 
두 분께서는 무척 기뻐하시며 나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자고 먼저 제안해 주셨다. 그리하여 우선 김수환 추기경님, 윤공희 대주교님과 함께 셋이서 다정하게 사진을 찍은 후, 이어서 윤공희 대주교님과 단둘이서도 기념사진을 소중하게 촬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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